시스의 신체는 눈을 제외하고는 완전히 정지 상태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지만 시스는 느낄 수 있었다. 차츰차츰 몸에서 생기와 온기가 빠져나가고 있음을. 말하자면 시스는 시시각각 죽음을 향해 한 발 한 발 끌려가고 있음을 생생히 자각하는 중이었다.
마차의 작은 창으로 내다보이는 풍경은 어떨 때는 우거진 숲이었고 어떨 때는 반짝이는 강이었고 어떨 때는 키 큰 풀들이 가득한 초지였고 어떨 때는 이름 모를 작은 꽃들과 푹신한 이끼가 덮이고 물웅덩이들이 흩어져 있는 습지였다. 낮의 물웅덩이는 하늘이 들어앉아 새파랬다.
동쪽으로 갈수록 봄빛이 짙어졌다. 연록으로 물드는 땅은 아름다웠다. 그 아름다움을 깨달을 때마다 시스의 마음은 무너지고 일어나거나 일어나고 무너졌다. 절망과 희망이 손바닥과 손등처럼 하나였다.
전생에 현명한 사제의 지팡이였던 영향일까. 케노는 기대 이상으로 슬기롭고 속이 깊었다. 케노는 라무스에게 말을 다루는 법과 마차 모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해 성실히 배웠다.
반나절도 채 되지 않아 말들과 친해지고 마차를 능숙하게 다루게 된 케노는 라무스와 교대로 마부석에 앉겠다고 주장했다. 덕분에 라무스는 케노가 마차를 맡아 주는 동안 충분히 쉴 수 있었다.
피네툼 선착장까지는 무척 멀었다. 마차는 말들에게 먹이와 휴식을 줄 때를 제외하고는 밤낮으로 쉬지 않고 달렸다. 땅의 모양을 변형시켜 거리를 단축하는 케노의 재주는 가도에서는 통하지 않았다. 케노의 능력은 산속을 지날 때만 유효했다.
가도를 달리는 마차 안에서 시스는 점점 시들어 갔다. 그녀는 이전보다 더 자주 그리고 더 오랫동안 눈을 감고 있었다. 잠을 자는 것은 아니었다. 그냥 그게 편했고, 그저 멍하니 풍경만 보는 것도 이제는 피곤한 기분이 들었다.
어느 밤인가 시스는 실로 오래간만에 꿈을 꾸었다.
‘시스, 시스.’
꿈속에서 시스는 프레케스 저택에서 소파의 등받이에 옆으로 몸을 기대고 낮잠을 자는 중이었다. 깨우는 소리에 일어나 보니, 물론 꿈속에서 일어난 일인데, 꿈마녀가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꿈마…… 아니, 백작 부인!’
반가운 마음에 시스가 큰 소리로 외쳤다. 꿈마녀는 귀를 막는 시늉을 하며 시스의 옆에 걸터앉았다.
‘궁금했어. 한동안 못 만났잖아. 내가 불러도 안 나타나고.’
꿈에서 시스는 예전처럼 말하고 움직이고, 자신의 몸을 자신의 의지대로 할 수 있었다. 다행스럽고 기쁘면서도 꿈에서 깨어 돌아갈 현실이 서글펐다.
‘무서웠거든. 들킬까 봐.’
어깨를 움츠리고 몸서리를 치는 꿈마녀의 공포가 시스에게 그대로 전해져 왔다.
‘누구? 누구한테 들킨다는 거야?’
‘말리티아.’
꿈마녀가 입에 담는 것조차 사위스럽다는 듯 소곤거렸다. 시스는 너무 놀라 잠시 말을 잃은 채 휘둥그런 눈으로 꿈마녀를 보다가 이윽고 다급하게 물었다.
‘뭐? 말리티아? 백작 부인이 말리티아를 알고 있었어?’
‘그런데 시스, 이상한 점이 있어. 말리티아가 왜 그렇게 늙었을까? 내 아이와 나의 백작님을 빼앗아간 말리티아가 틀림없는데…… 내 아이는 아직 어린데…… 왜 말리티아는 그렇게 늙어 버렸지? 그리고 어떻게 말리티아가 다피넬의 엄마인 거지? 분명 그 흑주술사, 마가, 말리티아가 맞는데?’
자신의 팔을 교차시켜 어깨를 안은 꿈마녀의 눈동자가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말리티아가 당신의 아이와 백작님을 빼앗았다고? 그런 짓을 한 말리티아는 젊고 아름다웠겠지? 겉으로는 한없이 친절한 미소를 지으면서 뒤로는 악행을 저지르고?’
자신이 직접 보고 겪은 말리티아의 사악한 본색을 회상하면서 시스가 물었다.
‘맞아. 말리티아는 나를…… 나에게 흑주술을 걸어서 나를…… 죽였어!’
꿈마녀가 절규했다.
‘백작님은 내가 미쳐서 그렇게 된 줄 알고 계시지만, 아니야. 그년이 한 짓이야. 얼마나 잔인한지 알아? 난 미치지 않았는데 내 생각은 멀쩡한데, 내 몸이 생각과 따로 놀았어. 몸이, 손이, 미친 짓을…… 무서운 짓을…… 바느질을 하다 재봉 가위로 내 소중한 아이의 목을 겨, 겨누고, 찌, 찌르려고 했어. 맹세코 내가 그러려고 한 게 아니야. 안 그러려고 이를 악물었는데도 내 몸이 내 몸이 아니었어!’
그 일을 다시 겪기라도 하는 것처럼 꿈마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찢어진 입술에서 핏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눈물이 흘러 피와 함께 드레스 앞섶을 적셨다.
‘아아, 가여운 백작 부인.’
시스는 손을 뻗어 꿈마녀의 등을 쓸었다. 피와 눈물이 얼룩진 그녀의 옷을 유심히 보던 시스는 문득 어떤 사실을 깨우쳤다. 꿈마녀가 입은 드레스는 시스가 입고 있는 것과 디자인이 많이 달랐다.
‘당신이 입은 이 드레스 말이야. 적어도 백 년쯤 전의 스타일이야.’
앙켑세라가 시스에게 자신의 할머니가 남겼다는 유품들을 보여준 적이 있었다. 각종 보석과 장신구, 구두와 드레스. 그 드레스와 꿈마녀의 드레스는 여러 군데 비슷한 디자인이 들어가 있었다.
‘백 년 전? 내가 죽고 그렇게 많은 세월이 흘렀다고? 내 아이, 우리 도련님은 아직 어린데? 내가 기억하는 그대로인데?’
꿈마녀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고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도리질을 쳤다. 혼란과 충격에 휩싸인 듯했다.
‘이름이 뭐야? 사람들이 당신을 부르던, 진짜 이름 말이야.’
‘이름? 내 이름이 뭐였더라? 뭐였지? 모르겠어. 기억이 나질 않아.’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꿈마녀가 처량하게 시스를 보았다.
‘알았어, 괜찮아. 힘들면 억지로 기억해내려 애쓰지 마. 그런데, 지금 나를 찾아온 건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인 것 같은데. 맞아?’
시스는 부드러운 말로 꿈마녀를 달랬다.
‘맞아. 나를 대신하여 말리티아를 고발해 달라는 말을 하려고 왔어. 말리티아를 최초 신전에 고발해 줘. 그런 사악한 흑주술사는 아우로라 여신께서 최초 신전에 맡기신 권능으로 벌해야 해. 시스, 제발 부탁이야. 그년을 고발해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