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노. 시스의 망토를 네가 입어라. 시간을 아끼려면 불필요한 시비에 휘말릴 가능성을 아예 차단하는 게 나으니까. 무슨 말인지 알겠니?”
지느러미 여관에서 마주칠지도 모르는 뭇사람들이 케노의 특이한 생김새를 보면 마물이나 괴물로 오해할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그런 오해는 배척과 공격으로 이어질 공산이 높았다.
“안다. 내가 너희들과 다르게 생겼다는 뜻이다. 그래서 인간들이 나를 싫어할 거라는 뜻이다. 말리티아가 그랬다. 나를 마물이라고 하면서 욕했다.”
슬픔이 서린 어조로 말하면서 케노는 재빨리 시스의 망토를 자신의 몸에 걸쳤다. 망토는 키가 작은 케노의 외다리와 발을 고스란히 가려 주었다. 후드를 푹 눌러쓰고 얼굴을 숙이자 외눈과 풀빛의 피부도 보이지 않았다. 소매가 길어 풀빛의 손도 바깥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미안하다.”
지켜보던 라무스가 사과했다. 케노가 맞닥뜨릴 수도 있을 편협하고 부당하고 적대적인 상황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웠다. 인간들의 세상에는 케노가 발붙일 곳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케노는 으슥하고 외진 어딘가에 숨어 평생 외톨이로 살아가야 하는 걸까.
“라무스가 미안할 것은 없다.”
케노가 시스를 등에 업었다. 라무스는 자신의 망토를 시스에게 덮어 주고 말고삐를 잡았다. 세 사람은 묵묵히 지느러미 여관을 향해 걸었다. 케노는 두 다리로 걷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최대한 작은 동작으로 폴짝폴짝 나아갔다.
지느러미 여관에서는 모든 일이 순조로웠다. 라무스와 일행이 휴식을 취하는 동안 여관의 관리인은 라무스가 부탁한 모든 준비를 신속하게 갖춰 주었다. 마차와 식량을 확인한 라무스는 녹스 용병단의 단주 파보르에게 편지를 쓰고 서명을 하여 여관 관리인에게 넘겨주었다.
해당 비용을 지불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관리인은 물품 내역서와 이 편지를 여관의 소유주 콤메르가 보내는 수금인에게 전해 주면 되는 거였다. 콤메르의 수금인은 대략 두세 달에 한 번 꼴로 방문했다.
출발하기 전에 라무스는 시스와 케노에게 풀게트 관문까지 어떤 경로를 거쳐 갈 예정인지 설명해 주었다.
마차로 초승달 호수 남쪽의 피네툼 선착장으로 간다. 거기에서 초승달 호수를 남북으로 오가는 상선을 타고 윗송곳니 반도에 인접해 있는 물방울 섬까지 간다. 물방울 섬에서 도보로 윗송곳니 반도로 건넌 다음 북동쪽으로 길을 잡아 풀게트 관문까지 간다.
시스는 알았다는 뜻으로 속눈썹을 깊게 내렸다가 올렸다.
초승달 호수는 모루스 해에서 대륙 쪽으로 바닷물이 흘러들어 형성된 광대한 석호였다. 초승달의 등 부분에 호수의 입구가 있는데 그 북쪽 반도를 윗송곳니, 남쪽 반도를 아랫송곳니라고 불렀다. 지도로 보면 남과 북의 반도가 옆에서 보는 짐승의 송곳니 같았기 때문이었다.
물방울 섬은 윗송곳니 반도와 바투 붙어있다시피 했다. 초봄의 그믐 무렵 며칠 동안 아침과 저녁 한 시간 정도씩 물방울 섬에서 윗송곳니까지 바닷길이 열리는데 때마침 그 시기가 가까웠다.
윗송곳니 반도는 대륙의 동쪽 해안 지형이 다 그렇듯이 깎아지른 절벽이어서 배가 정박할 수 없었다. 따라서 초승달 호수에서 윗송곳니 반도에 발을 디디려면 물방울 섬에서 바닷길을 걸어가 절벽을 따라 나 있는 가파르고 좁은 길을 올라가는 수밖에 없었다.
초승달 호수를 내륙 쪽으로 빙 두르는 육지의 가도로 마차를 달려 풀게트까지 가는 것보다 배로 호수를 가로지르는 편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빠른 경로였다.
“번개 반도에는 도채비족이 있다고 하더군.”
라무스가 덧붙였다.
“보아 하니 시스 당신, 고대 문자와 상고 시대의 문학을 많이 알던데 도채비족에 대해 읽거나 들어본 적이 있나?”
시스는 눈으로 ‘그렇다’고 대답했다. 도채비족은 요정이나 정령은 아니지만 인간도 아닌, 인간과 흡사하지만 천성이 선하고 맑은 종족이었다. 세상 사람들은 요정이나 정령이 그러했듯이 도채비족도 이미 멸족했다고 알고 있었다.
‘도채비족이 이 땅에서 다 사라진 게 아니었단 말이야?’
입 밖으로 내지 못하는 시스의 질문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 라무스가 말을 이었다.
“나도 반은 믿고 반은 안 믿어. 그 이야기를 들려준 분이 굉장히 믿을 만한 분이긴 한데, 그분도 부친께 전해들은 거라고 하시고. 더구나 그분의 부친께서 그 말씀을 해주신 것이 돌아가시기 직전이었다니까 기억에 혼란이나 착오가 있었을 수도 있고 말이야. 어쨌든 우리가 머지않아 확인할 수 있겠지. 풀게트 관문을 지나 번개 반도를 찾기만 한다면.”
라무스는 그 믿을 만한 분이 파보르라는 말은 생략했다. 시스가 그것까지 알아야 할 필요는 없었다.
번개 반도는 윗송곳니의 동쪽에 붙어 있다고 하는데 지도에는 나오지 않았다. 본 사람이 없기 때문이었다. 윗송곳니의 풀게트 관문에서 번개 반도 쪽을 건너다보면 하늘은 구름이 가득한 가운데 무수한 번개가 번쩍거리고 새하얀 안개비가 자욱하게 시야를 가로막았다.
“그분의 부친이 번개 반도에서 만난 이들이 어떤 이들인지는 몰라도 신묘하고 선량하다는 건 사실인 것 같아. 죽을 운명이었던 그분이 그들의 도움으로 살았다고 들었으니까. 그러니까 시스. 희망을 가져. 그럼 이제 가 볼까?”
이 무렵 여관 관리인은 여관 안의 사람들을 모두 식당으로 불러 모았다. 푸짐한 공짜 점심 식사를 대접하겠다는 명목이었으니 손님들이나 일하는 사람들이나 마다할 까닭이 없었다. 실제 내막은 라무스가 남의 이목을 피해 조용히 여관을 떠나기 위해 미리 부탁한 바였다.
시스와 케노를 마차 안에 태우고 라무스는 마부석에 앉았다. 그는 두 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를 능숙하게 몰아 동쪽으로 난 가도를 향했다.
마차 벽에 비스듬히 기대앉은 시스는 빠르게 지나가는 바깥 풍경을 눈에 담으며 이 여행의 끝에 어떤 풍경 어떤 존재를 만나게 될지 예상해 보려 애썼다. 그러나 궁리하고 또 궁리해 봐도 짐작되지 않았다. 결국 드는 생각은 하나였다. 죽거나, 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