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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정말 거길 가겠다고?

by 화진


‘세상 누구라도 아무런 죄 없이 저렇게 부당하고 억울하고 잔인한 일을 당해선 안 돼. 사람을 살아 있는 인형으로 만들고 결국은 죽음에 이르게 하는 흑주술이라, 너무 사악하고 끔찍한 짓이잖아.’


시스를 안고 소리 없이 풀쩍풀쩍 뛰어서 가는 케노의 뒤를 말들과 함께 따르면서 라무스는 생각했다. 반드시 성공한다는 보장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는 흑주술을 풀어 시스의 목숨을 구할 방법을 알고 있었다. 방법이 있는 이상 시도해 보는 것이 옳았다.


길을 잃은 자를 모른 체하지 말라는 조상의 가르침이 있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유바론 가의 가훈은 ‘길잡이별’이었다. 길을 잃으면 눈을 들어 길잡이별을 찾을 것, 길을 잃은 자에게 길잡이별이 되어줄 것.


가문의 문장 또한 거친 파도가 치는 절벽 위 하늘에서 빛나는 길잡이별이었다.


계절과 기후가 이른바 마가룸의 저주로 순리에서 벗어나는 경우가 많은 시데레온이 그 불리한 조건에도 유서 깊은 독립국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 바로 모든 백성이 서로 길잡이별이 되어 똘똘 뭉쳤기 때문이었다.


라무스는 북쪽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길잡이별이 밝게 떠 있었다. 시선을 내려 앞을 보니 케노의 어깨 위 귀린의 불꽃이 길을 번히 비춰 주었다. 일행은 동쪽으로 가고 있었다. 고래 산맥의 옆구리 부근에 있는 지느러미 여관으로 가려면 그 방향으로 산을 내려가야 했다.


어젯밤에 이어 라무스는 또 밤을 새워 움직이는 중이었다. 그는 강인한 정신력과 의지로 고단함을 억눌렀다. 지금 시스에게는 시간이 금보다 귀했다. 라무스는 말을 타고 있을 때 잠깐씩 조는 것으로 기력을 보충했다.


케노가 있어서 천만다행이었다. 케노는 피로라는 걸 모르는 듯 줄곧 쌩쌩했고 도중에 단 한 번도 시스를 내려놓지 않을 만큼 힘이 좋았다.


말 등에서 까무룩 졸다 고개를 든 라무스는 깜짝 놀랐다. 별들이 자취를 감추는 하늘을 보니 곧 새벽이 올 모양인데 눈앞에 지느러미 여관으로 가는 오솔길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셋이서 길을 나선 지점에서 여기까지는 이틀 가까이 걸리는 거리였다.


혹시 자신이 말을 탄 채로 긴 시간 잠들어 있었던 건 아닌지, 라무스는 혼란스러웠다.


“케노.”


앞서 가던 케노가 멈춰서 기다렸다. 시스는 잠이 들었는지 눈을 감고 있었다.


“우리가 어젯밤에 출발한 거 맞지? 지금은 바로 다음 날 새벽이 가까운 시각이고.”


“맞다. 밤 동안 꼬빡 달려왔다.”


“그러니까 이틀을 와야 하는 거리를 하룻밤 사이에 온 거지?”


“아, 원래는 이틀쯤 걸리는 건가? 라무스가 시간이 없다고 했다. 그래서 내가 땅을 좀 움직였다. 내 재주로는 이만큼이 최대한이다. 더 빨랐어야 했나?”


풀빛의 오동통한 얼굴에 지친 기색이 엿보였다.


“시간이 많이 단축돼서 놀란 거야. 고맙다, 케노. 피곤해 보이는데 괜찮은 거냐, 너?”


라무스의 말투가 제법 친절했다.


“아직은 더 갈 수 있다.”


케노는 밝고 씩씩하게 제자리에서 통통 뛰어 보였다.


둘의 말소리에 시스가 눈을 떴다. 움직이지도, 표정을 짓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시스는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케노. 이렇게 나를 도와줘서 정말 고마워. 그런데 있잖아. 너의 색다른 모습을 사람들이 보게 되면 좋지 않은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어. 그러니 내 망토를 네가 입는 게 좋겠어. 후드도 푹 눌러 쓰고.’


‘라무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나를 여기 두고 당신 갈 길을 가. 진심이야. 계속 생각해 봤는데 나를 위해 당신이나 케노가 생사를 장담할 수 없는 곳으로 갈 것까지는 없어. 이대로 죽는 건 억울하고 분하지만, 당신과 케노를 저세상 길동무로 끌고 가고 싶지는 않거든.’


라무스가 말에서 내려 시스에게 다가왔다.


“조금만 더 가면 지느러미 여관이야. 내가 거기 주인하고 아는 사이야. 일단 마차와 식량을 빌리고, 그것들이 준비되는 동안 짧게 눈을 붙인 다음 떠나자고. 방은 하나만 빌릴 거야. 그 상태인 당신과 케노 둘을 따로 떨어뜨려 두자니 아무래도 불안해서 말이야. 불만 없지?”


대답을 대신하여 눈을 깜빡이기에 앞서 시스는 라무스의 눈을 시간을 들여 응시했다.


‘제발, 제발 좀 내 눈빛으로 내 생각을 읽어 봐. 나를 두고 가도 괜찮다니까.’


“불만 있어도 어쩔 수 없어. 그리 오래 있을 것도 아닌데 좀 참아.”


라무스가 살짝 엄격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은 시스의 본심을 짐작했지만 일부러 딴소리를 한 거였다.


‘라무스. 풀게트 관문을 넘어서 번개 반도로 가려는 거잖아. 번개 반도는 진짜로 존재하는 땅인지 아니면 그저 오래도록 사람들을 현혹시킨 전설일 뿐인지도 확실치 않아. 풀게트 관문을 넘어가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해서 지금껏 확인할 수 없었던 거잖아. 번개 반도에 가면 죽은 사람도 살릴 수 있다고들 하지만 그건 그저 갈 수 없는 신비로운 땅을 두고 키운 사람들의 환상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어. 그런데 정말 거길 가겠다고? 거기에 뭐가 있는지도 모르는데?’


“시스. 번개 반도는 진짜로 존재하는 땅이야. 거기에 다녀온 사람을 내가 알아. 정확히는 다녀온 사람의 아들을 아는 거지만. 하지만 거기에 간다고 당신을 반드시 살릴 수 있다고는 장담할 수 없어. 그래도 할 수 있는 건 다 해 봐야지.”


파보르가 들려준 이야기를 회상하면서 라무스가 천천히 말했다. 운명 공동체로 엮인 이상 그녀도 당연히 모든 것을 자세히 알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었다.


“그러니까 행여 우리가 조금 늦더라도 번개 반도에 도착할 때까지는 죽지 마. 알았어? 버티란 말이야. 기왕 이렇게 된 거 당신 눈으로 똑똑히 봐야지. 번개 반도가 어떤 곳인지. 대답을 줘. 살아서 함께 풀게트 관문을 지나겠다고, 그 전에 죽는 일은 절대 없을 거라고.”


타오르는 듯 형형한 푸른 눈에 어느 때보다 진심을 담아 라무스가 요구했다. 시스는 봄날의 호수 같은 담녹색 눈을 느리게 한 번 깜빡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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