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치고는 걸걸한 목소리로 말을 마친 케노가 손가락을 딱 하고 튕기자 녹색의 불꽃이 생겨났다. 횃불 못지않게 밝은 불꽃은 케노의 어깨 부근에 머물면서 주위를 환히 비추었다.
케노라는 이름에 시스의 눈동자가 반응했다. 아! 지난번에 석굴에서 보았던 녹색 불꽃이 자기 이름이 케노라고 했었는데!
‘케노? 그 귀린이 너였단 말이지?’
시스는 놀랍기도 하고 반갑기도 했다.
라무스는 간밤에 누군가가 자신을 따라오는 듯 느껴졌던 것이 착각이 아니었음을 알았다.
“너, 어젯밤에 내 뒤를 밟아 온 거냐?”
그런 신체 조건으로 거의 기척 없이 이동할 수 있다니, 너 제법 신묘한 아이로구나. 라무스는 내심 감탄했다.
“응. 내 주인님께 진혼의 피리를 불어준 게 당신이지?”
케노가 짧은 더벅머리를 긁적였다.
주인님? 진혼곡? 네가 거기에 있었다고? 라무스는 석굴 안의 유해 옆에 묻어준 지팡이를 떠올렸다. 마침 시스도 말리티아가 모닥불 속으로 던져 넣으려던 지팡이를 생각하던 참이었다.
‘오래된 지팡이로 보이는 그것이 귀린의 본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진짜였네.’
어쩐지 불속에서 타 버리게 놓아두면 안 될 것 같더라니. 시스는 뿌듯한 미소를 지었지만 그건 마음뿐이고 정작 케노와 라무스의 눈에 비친 그녀의 얼굴은 표정 없이 굳은 채였다.
“혹시 네가 그 케케묵은 지팡이인가? 그리고, 넌 왜 시스를 도우려고 하지?”
라무스가 물었다. 말투가 건조한 탓인지 다그치는 모양새가 되어 버린 것이 조금 미안했다. 하지만 케노는 전혀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맞다. 난 원래 튼튼하게 자란 명아주였고, 지팡이였고, 귀린이었다. 귀린의 아이로 변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아직 머릿속이 혼란스럽고 기억도 감감하지만 내 주인님께서 무척 인자하고 현명한 사제님이었다는 건 확실히 기억한다.”
차분하고 해말간 낯빛으로 무덤덤하게 답하던 케노가 잠시 말을 끊더니 경의가 담긴 눈으로 시스를 바라보았다.
“나는 밤에는 귀린이 되어 자유롭게 날아다녔지만 낮에는 본모습인 지팡이로 돌아가야 했다. 나쁜 말리티아가 지팡이의 모습인 나를 땔감으로 불에 던지려는 걸 시스가 구해줬다. 시스는 내 은인이다. 그런데 당신, 당신의 이름은 뭔가?”
눈을 들어 라무스를 똑바로 보며 케노가 물었다.
“난 라무스야.”
“라무스. 나는 당신에게도 은혜를 입었다. 당신의 피리 소리가 나를 지팡이에서 귀린의 아이로 변모시켰다.”
“그건 아닌 것 같은데. 내가 불었던 건 고작 풀피리에 불과했거든. 그저 우연의 일치겠지.”
케노는 팔짱을 끼고 몸에 비해 큰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피리 소리 때문이다. 나는 안다.”
케노의 단언이 너무나도 확신에 차 있어서 라무스도 더는 토를 달지 않았다. 어떻게 받아들이든 그건 네 마음이겠지.
“그건 그렇고. 이제는 낮밤 무관하게 자유자재로 변신할 수 있는 건가? 귀린이든 지팡이든 지금의 그 모습이든?”
같은 궁금증을 품고 있던 시스는 라무스가 가려운 곳을 긁어준 듯 시원한 기분으로 케노를 주시했다.
“지금의 이 모습과 지팡이로만 바뀔 수 있다. 귀린은 이렇게 만들어낼 수 있지만 내가 귀린이 될 수는 없다.”
케노가 어깨 위의 녹색 불꽃을 가리켰다.
“불꽃을 그렇게 척척 만들어낼 수 있다니 편리하겠군.”
“그래 봤자 어둠이나 밝히는 것뿐이다. 무엇을 태우거나 하지는 못한다.”
“언제든 필요할 때에 어둠을 밝힐 수 있다는 건 아주 대단한 거야. 그렇지, 시스?”
라무스의 말에 시스가 눈을 한 번 깜빡여 동의했다.
“시스. 당신을 케노에게 맡겨도 될까? 케노가 그만큼 힘이 세다면 말이야.”
사실 라무스도 바라는 바였다. 케노가 힘이 몹시 세기를, 하여 시스를 케노가 안고 갈 수 있기를. 그도 그럴 것이 귀족 레이디인 시스의 입장에서는 외간 남성인 라무스에게 안기는 것이 불편할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시스는 망설임을 담은 눈을 가만히 뜨고 있었다. 손 하나 까딱하지 못하는 몸을 온전히 내맡기기 거북한 건 라무스나 케노나 거기서 거기였다.
“케노 힘 무지무지 세다. 걱정 마라. 케노 풀잎처럼 가볍게 사슴처럼 빠르게 뛸 수 있다. 정말이다.”
뒤이어 라무스가 짧게 덧붙였다.
“그리고 케노는 여자아이니까 나보다 덜 부담스러울 텐데.”
가뜩이나 큰 케노의 외눈이 반달처럼 휘둥그레졌다.
“어떻게 알았나?”
할 수만 있다면 시스도 케노처럼 눈을 커다랗게 떴을 것이다. 시스는 케노가 남자아이인 줄 알았으니까.
“더벅머리에 걸걸한 목소리를 내지만 처음부터 내 눈에는 영락없는 소녀던데?”
쑥스러웠는지 케노가 얼굴을 붉혔다. 풀빛의 통통한 뺨이 연한 주황색이 되었다. 라무스는 희미하게 웃고는 시선을 시스에게로 돌렸다.
“케노가 낫겠지, 시스?”
시스가 눈을 한 번 깜빡했다. 수긍의 대답이었다.
“케노. 시스를 부탁해.”
케노는 시스를 가볍게 안아 들었다. 그러고는 하나밖에 없는 다리로 깃털처럼 가볍게 뛰어 몇 걸음 가다 말고 문득 뒤를 돌았다.
“라무스. 그런데 어디로 가는 건가, 우리?”
“우선은 지느러미 여관으로 가야지. 거기서 마차와 식량을 준비한 다음 풀게트 관문으로 갈 거야. 최대한 빠르게.”
말하면서 라무스가 시스와 눈을 마주쳤다. 당신에게 걸린 흑주술을 풀어서 당신을 살리려는 거야. 시도도 해보기 전에 당신이 죽으면 안 되니까 서둘러야겠지.
시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풀게트 관문? 그 관문을 넘는 건 불가능해. 그런데 당신이 나를 위해서 거길 넘어가겠다는 거야?’
살고 싶었고, 속으로 살려 달라고 애원하긴 했지만 시스는 라무스가 이렇게까지 나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왜? 당신이 왜 나를 위해 그런 위험을 감수하지?
“당신은 모르겠지만 내 조상님들의 가르침이, 사람은 누구나 길을 잃을 때가 있다, 거든. 그러니 길을 잃은 자를 모른 체하지 말라는 속뜻이 있는 가르침이지. 당신은 지금 길을 잃은 자 그 자체고.”
솔직히 라무스도 자신의 마음을 선명하게 이해하지 못했다. 정녕 가문의 가르침 때문인지, 단지 임무의 완수를 위해서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