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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어떻게 이번에도 또 당신이지?

by 화진


한 팔로 무릎을 감싸 안은 채 웅크리고 있던 시스는 화들짝 고개를 들어 말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시선을 던졌다. 검게 물든 나무들의 설핏한 윤곽이 괴기스러웠다.


말리티아가 날 선 말투로 외쳤다.


“누구지? 나와. 모습을 드러내.”


먹빛으로 우거진 나무 사이에서 사내 하나가 그림자처럼 소리도 없이 스윽 걸어 나왔다. 검은 망토를 입고 같은 색 두건으로 얼굴을 가린 그는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것만으로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꼬락서니를 보아 하니 기사는 아닌 것 같은데……. 다피넬이나 데세르가 시스를 되찾기 위해 고용한 어중이 검술사쯤 되나 보군. 그나저나 제법이구나. 용케도 우릴 찾아냈어.”


말을 늘어놓으면서 말리티아는 손을 뒤로 하여 돌돌 감아 묶어 놓은 자신의 모포 속을 헤집어 무언가를 찾았다.


“여하간 공작 부인은 내가 데려가겠어.”


라무스는 팔짱을 낀 채 무덤덤하게 말했다. 늙은 여자를 상대로 검을 쓸 생각은 없었다. 상대가 어떤 식으로든 기습해 온다 해도 충분히 막아내거나 피할 수 있었다. 다만 되도록이면 그런 귀찮은 과정은 생략했으면 싶었다.


임무는 시스를 카푸까지 데리고 가는 것이었다.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라면 굳이 피를 볼 이유가 없었다. 라무스가 납치범인 노부인을 죽일 작정이었다면 그녀는 낯선 인기척을 인지하기도 전에 저세상 사람이 되었을 터였다.


시스는 아연실색하여 사내를 쳐다보았다. 저 실루엣, 저 목소리! 그녀와 신전의 여신상 아래 나란히 서서 결혼 서약을 했던 가짜 신랑, 다피넬의 서재에서 함께 청금석에 새겨진 님파의 서를 훔쳐봤던 남자, 라무스!


‘어떻게 이번에도 또 당신이지?’


그와 눈길이 마주쳤고 시스는 눈빛으로 물었다. 그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고는 짐짓 정중한 태도로 손을 내밀었다.


“공작 부인, 나와 함께 가셔야겠습니다.”


사악한 흑주술사 말리티아보다는 정체 모를 라무스를 따라가는 편이 나은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시스가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말리티아가 불렀다.


“시스, 이리 와.”


데세르와 말리티아의 강력한 주술에 걸려 있는 시스는 그 말을 거역할 재간이 없었다. 시스의 의지는 라무스에게 달려갔지만 몸은 이끌리듯 말리티아에게 다가갔다.


“어이 거기. 잘 들어.”


말리티아가 라무스를 향해 말했다.


“네놈이 시스를 데려가면 그녀는 머지않아 죽어. 빈말이 아니야. 그렇지 시스?”


시스는 싸늘한 분노를 담아 말리티아를 노려보았다.


무슨 짓을 당할지 모르는 마물들의 폐허로 끌려가는 것보다는 라무스를 따라가는 게 낫다는 게 그녀의 판단이었다. 비록 남은 시간이 길지는 않지만 일단은 말리티아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야 이 끔찍한 흑주술을 풀 방도를 찾는 노력이라도 할 수 있을 테니.


“시스, 싸워라. 저자를 죽여!”


모포 안에서 찾아낸 단검을 시스의 손에 쥐여 주며 내뱉은 말리티아의 명령은 냉혹했다.


“싫어! 내가 왜…….”


시스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그녀의 행동은 말보다 빠르게 말리티아의 말에 복종하고 있었다. 단검을 치켜들고 라무스에게로 돌진하여 거리를 좁힌 시스가 땅을 박차고 뛰어올라 그의 심장에 단검을 찔러 넣었다.


라무스는 날쌔고 유연한 움직임으로 시스의 단검을 비켜났다. 그 와중에도 그는 놓치지 않았다. 자신을 공격하는 그녀의 눈에 살기가 아닌 혼돈스러움이 들어차 있는 것을. 그녀가 필사적으로 단검을 휘두르는 동시에 머리를 가로저으며 괴로워하는 것을.


말리티아가 예상했던 대로 라무스는 회피와 방어의 기술만 사용했다. 한 팔에 부목을 댄 채 나머지 한쪽 손에 단검을 잡고 달려드는 시스를 상대로 그는 검을 뽑지 않았다.


한편 시스는 말리티아가 그만하라는 명령을 새로 내리지 않는 한 싫어도 힘들어도 계속 라무스를 공격할 수밖에 없었다. 완전히 기진맥진하기 전까지는. 그러니 시스로서는 그가 잘 피하기를 바라면서 힘을 다 소진하고 쓰러져 버리는 수밖에 없었다.


“단검 쓰는 법을 제대로 익혔군. 장검도 배웠나?”


일격을 피하는 한편 균형을 잃고 쓰러지려던 시스의 허리를 한 팔로 부드럽고 민첩하게 감아 일으켜 세우고는 재빨리 그녀에게서 떨어지며 라무스가 물었다.


“아니.”


시스는 거짓말을 했다. 자신이 장검을 다룰 수 있다는 사실을 말리티아가 알아서 좋을 것이 없었다. 라무스는 그녀의 눈과 표정에서 거짓말을 간파했고 그녀가 뭔지 모르게 정상적인 상태에서 벗어나 있다는 걸 깨달았다.


서서히 지쳐 가면서도 시스는 멈추지 않았다. 아니 멈추지 못했다. 그녀는 숨을 몰아쉬면서 손놀림이 조금씩 무뎌졌고, 라무스는 점점 더 수월하게 그녀의 칼끝을 피했다.


“이상하군.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라무스의 질문에 시스가 답하기 전에 말리티아가 소리쳤다.


“닥쳐, 시스, 너에게서 말과 표정을 거둔다.”


순간적으로 시스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그녀는 말을 내보내지 못하고 물고기처럼 입술만 뻐끔거리다 곧 입을 다물었다. 그 동안에도 그녀의 단검 공격은 힘겹게 계속되었다.


‘흑주술인가?’


말리티아를 등졌을 때 라무스가 입모양으로 물었다. 시스가 살짝 고개를 까닥였다.


두 사람의 동태를 살피면서 말리티아는 귓불이 베어져 나간 자신의 귀를 가만히 꼬집어 핏방울을 받았다. 그것을 땅에 문지르고 거의 소리가 나지 않게 입속으로 웅얼웅얼 주문을 걸었다. 땅이 꿈틀꿈틀하더니 독사뱀이 머리를 내밀었다.


‘거의 다 됐어. 주문을 마저 외우면 저자는 끝이야.’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주문을 완성하려던 말리티아가 갑자기 ‘으헉!’ 하고 비명을 지르며 혼비백산했다. 공들였던 주술이 물거품이 되었다. 독사뱀은 흙으로 변해 버렸다. 말리티아는 엉덩이로 뒷걸음질치며 믿기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렸다.


“너, 넌…… 마, 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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