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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지팡이와 청동 펜던트

by 화진


라무스는 시스를 뒤쫓는 길을 서두를 수 있는 만큼 서둘렀다. 그는 밤에도 횃불을 밝혀 들고 전진했다. 잠은 최소한으로 줄였다.


시스의 머리카락을 발견한 이후로 라무스는 군데군데에서 말과 사람의 족적을 찾을 수 있었다. 때로는 시스가 일부러 남긴 것 같은 표식도 남아 있었다. 레이스 리본에서 뜯어낸 조각 혹은 뽑아서 매듭을 지은 머리카락이나 자잘한 돌멩이를 모아 쓴 그녀의 이름 등이었다.


추측했던 그대로 흔적은 마물들의 폐허를 향해 이어지고 있었다.


‘거기에 뭔가가 있는 것 같아. 모종의 무리가 그곳에 자리 잡고 음습한 흉계라도 꾸미고 있는 게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굳이 시스를 거기까지 데려갈 이유가 없을 거야. 그런데, 왜? 왜 하필 시스일까?’


한 손에는 횃불, 한 손에는 말고삐를 쥔 채 어둡고 가파른 숲속을 신중하게 지나면서 라무스는 골똘한 생각에 사로잡혔다.


최근 티토니아에는 은밀한 활동을 벌이는 비밀스러운 집단들이 대두한 듯했다. 녹스 용병단에 님파의 서 전문을 찾아 달라고 의뢰한 것도 그들 중 하나일 것이다. 그렇다면 시스는 어느 쪽일까? 그녀가 님파의 서를 찾고 있었던 건 자발적인 것이었을까, 의뢰받은 것이었을까.


님파의 서가 요정의 호수와 얼어붙은 신성한 숲의 비밀을 푸는 열쇠라는 설이 있다고 언젠가 파보르가 언급한 적이 있었다.


모호하고 암시적인 노래인 님파의 서를 해독하면 모든 것을 삼키는 호수를 진정시켜 신성한 숲으로 건너갈 수 있다는, 그 숲에는 오늘날 전설로만 회자되는 그 옛날 요정시대의 힘과 보물이 잠들어 있다는 것이었다.


버려진 마물들의 폐허에 깃들어 있을지 모르는 마물의 힘을 이용하려는 자들이 있다 해도 놀랍지는 않은 일이었다. 다만 그자들은 어둠의 힘을 추구하는 자들일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사람이 들어가면 살아 나오지 못한다는 불온한 그곳에 발붙이지 못했을 테니까.


생각은 돌고 돌아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 왔다.


‘그런데 그런 자들이 어째서 시스를 필요로 하지?’


라무스는 이 풀리지 않는 의문을 제쳐두기로 했다.


지금 중요한 건 시스가 납치당한 이유가 아니라 그녀를 구하는 것이었다. 반드시 그녀가 마물들의 폐허에 발을 들이기 전에 구해 내야 했다. 거기에서 기다리고 있을 일당의 머릿수와 전력은 미지수였다. 그 미지수와 직접 맞닥뜨리지 않는 편이 낫다는 것은 자명했다.


밤이 가고 아침이 왔다. 라무스는 간단히 요기를 하고 곧바로 출발했다. 땅바닥이 비교적 고르고 완만한 지점이어서 말을 탈 수 있었다. 해가 지고 숲이 어두워졌을 무렵 그는 전날 밤 시스가 쉬어 갔던 석굴 근처까지 왔다.


석굴을 살펴보러 가던 라무스는 수풀에 묻힌 은은한 빛을 보았다. 그는 그것을 자세히 보기 위해 말에서 내렸다. 어둠 속에서 은은한 녹색 빛에 싸인 긴 막대기 같은 것이 눈에 들어왔다. 가까이 다가가자 빛은 사라져 버렸다. 라무스는 막대기를 집어 들었다.


‘원래는 지팡이였던 모양이군.’


석굴로 가 횃불을 만든 라무스가 막대기를 상세히 관찰한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얼마나 오래 되었는지 알 수 없을 만큼 낡고 가벼운 지팡이였는데 이상할 정도로 단단함이 느껴졌다. 그리고 얼룩이 묻어 있었다. 손잡이가 베어져 나간 자리라고 추측되는 부위에서 시작해 아래로 길게 한줄기 내리뻗은 검은 얼룩. 라무스가 보기에는 혈흔이었다.


지팡이의 주인이 목숨을 잃을 때 흘린 피의 일부이리라. 그렇다면 방금 전 지팡이가 빛을 발한 까닭도 이해가 갔다. 귀린, 나이가 아주 많은 나무에서 생겨난다는 빛의 덩어리. 이 지팡이는 주인의 피가 묻은 오래된 물건에서 마침내 귀린으로 화하였을 것이다.


천천히 횃불을 비춰 가며 바위벽으로 둘러싸인 굴을 조사하던 라무스는 마침내 땅에서 비죽 튀어나온 손가락뼈를 찾아냈다. 상태로 보아 몹시 오래 묵은 것이 틀림없었다. 뼈 주위를 조심스럽게 파면서 유골의 대강의 윤곽을 확인하던 그가 무언가를 들어 올렸다.


녹이 잔뜩 슨 청동 펜던트였다. 해와 달과 별이 합쳐진 모양의 청동 펜던트는 예로부터 사제들이 목에 거는 것이었다. 유골의 주인이 사제였던 듯싶었다. 라무스는 펜던트를 제자리에 돌려놓고 유골과 함께 다시 흙으로 덮었다.


석굴 밖으로 나간 라무스는 풀잎을 따 와 유골 앞에서 나직하게 풀피리를 불었다. 시데레온의 장례식에서 연주하는 진혼곡이었으나 풀잎이라는 소박한 도구로 모방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래도 짧으나마 정성스러운 선율로 사제의 유골을 위로했다.


귀린이 된 지팡이도 사제의 것이었으리라. 라무스는 지팡이를 사제의 유골 옆에 묻어 주기로 했다. 지팡이는 입구 가까운 곳에 세워져 있었다. 라무스는 머리를 갸웃했다. 거기에 둔 기억이 없었다. 바깥쪽에 눕혀 두었던 것 같은데…….


자신이 착각했으려니 하고 지팡이를 들던 라무스는 바위틈에서 아른거리는 가느다란 것에 손을 뻗었다. 눈보다 심장이 먼저 그것의 정체를 알아보았다. 등황빛으로 빛나는 명주실 같은, 시스의 머리카락이었다.


석굴 안팎으로 사람이 머물렀던 자취가 있었다. 흙을 덮어 끈 모닥불 자리는 무엇보다 확실한 증거였다. 시스와의 거리를 상당히 좁혔다는 판단에 라무스의 눈이 더욱 형형해졌다.


라무스는 빠르게 움직였다. 지팡이를 유골 옆에 묻고, 석굴 안쪽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로 목을 축였다. 가죽 부대에 물을 받아 말에게도 먹인 다음 그는 시스 일행이 갔음직한 쪽으로 길을 나섰다. 오늘밤은 휴식 없이 계속 시스 일행을 쫓아갈 계획이었다.


운이 좋으면 내일 안으로 시스를 따라잡을 수도 있을 듯했다. 라무스는 잠든 나무들 사이를 바삐 헤치고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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