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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느긋한 목소리

by 화진


풀과 나무, 숲은 언제나 라무스의 친구였다. 쉬지 않고 길을 가는 이 밤에도 숲은 그에게 호의적이었다.


라무스가 숲을 지나면서 공포를 느꼈던 건 일생 단 한 번이었다. 고향인 시데레온을, 집이었던 폴루스 니두스를 떠나던 날 토드 경의 칼에 베인 채로 홀로 눈 내리는 숲을 가로질러 가던 길에서였다.


찬찬히 돌이켜 생각하면 그때도 진정으로 두려웠던 건 숲 자체가 아니라 혼자 버려졌다는 막막함이었다. 숲은 그날도 변함없이 라무스를 포근히 감싸주고 가야할 길로 인도해줬다. 그렇지 않았다면, 휘몰아치는 눈보라 속에 어디가 어디인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뛰고 구르고 걷던 어린 소년이 무사히 숲을 벗어나 토드 경이 알려준 도로에 곧장 닿을 수나 있었을까?


라무스는 결코 산이나 숲에서 길을 잃는 법이 없었다. 녹스 용병단에서도 ‘길을 잃지 않는 라무스’라고 불릴 정도였다.


이 밤에도 그는 자신이 제대로 가고 있음을 확신했다. 그런데 평소와 다른 점이 있었다. 누군가가 따라오는 듯한 기분이었다. 당연히 그는 뒤를 주의했고 미행 같은 건 없었다. 기실 있을 턱도 없었다.


의아했지만 꺼림칙한 감은 아니었기에 라무스는 그 기분에 익숙해졌다. 밤의 숲이란 인간의 이해를 벗어난 세계를 내보일 수도 있으려니 하면서. 아직 유령이나 마물이나 요정을 조우한 적은 없었지만.


다음날 늦은 오후까지 쉼 없이 달려온 라무스는 이쯤에서 나무에 올라 주변을 정찰하자 싶어 말에서 내렸다. 가지가 많은 오래된 참나무에 반쯤 올라갔을 때 그는 하늘에 떠 있는 작은 점을 보았다. 점은 맑은 창공에 깃펜으로 먹물을 콕 찍어 놓은 것처럼 움직임 없이 떠 있었다.


라무스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손을 들어 흔들었다. 아비움네 오두막에서 없어진 그 이상한 새 녀석인가 하고.


아니나 다를까 하늘의 점이 스윽 그를 향해 내려왔다. 둥글고 흰 몸에 작은 날개, 그 녀석이 맞았다. 녀석은 그리로 올라오라는 듯 나무 꼭대기에 앉았다가 날아올랐다가 하며 깃털 사이에서 오묘하게 번뜩이는 눈으로 라무스를 쳐다봤다.


“알았다, 알았어.”


라무스는 가볍고 빠르게 가지를 타고 나무 꼭대기 근처까지 올라갔다. 새가 빙글 반원을 그리며 날았고 라무스의 눈은 녀석을 따라갔다. 녀석이 눈을 딱 맞추더니 느닷없이 저 멀리 보이는 계곡으로 쌩하니 멀어졌다.


“드디어 찾았군!”


새를 따라가던 라무스의 시선에 골짜기를 따라 올라가는 무리가 들어왔다. 사람 둘, 말 두 필. 두 여자는 가파른 비탈을 말과 함께 걸어서 오르고 있었다. 뒤에서 따라가는, 후드를 쓰지 않은 늘씬한 여자의 머리채가 석양빛을 받아 불그스름한 광채를 발했다. 틀림없는 시스였다.


나무를 내려와 새를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나타나고 싶을 때 또 나타나겠지. 라무스는 지체하지 않고 골짜기로 향했다.


*


온통 돌밭인 골짜기의 비탈을 다 오르자 다시 완만한 산림으로 접어들었다. 해는 뉘엿뉘엿 서산머리를 넘어가는 중이었다.


“오늘은 여기서 쉬어 가야겠다. 불을 피우고 저녁을 준비해라.”


어스름이 고이는 판판한 우묵땅을 가리키며 말리티아가 명령했다. 그녀가 말들을 챙기는 동안 시스는 낙엽과 마른 나무를 모아 불부터 지폈다. 그러고는 골짜기를 지나올 때 계곡물에서 잡은 물고기를 나뭇가지에 꿰어 구웠다.


이런 한 끼조차 사치가 되는 여정이었다. 먹을 수 있을 때 제대로 먹어두지 않으면 안 되기에 시스는 구운 생선을 허겁지겁 뜯어 먹었다. 한 치 앞을 모르는 상황에서도 잘 익힌 생선살의 고소한 맛이 느껴져서 시스는 웃고도 싶었고 울고도 싶었다.


말리티아가 시스를 보더니 쯧쯧 혀를 찼다.


“그 입가의 검댕은 소매로라도 좀 닦아 가며 먹지 그러니. 흉하구나.”


“손이 없잖아요, 손이.”


시스가 한 손에 든 생선 꼬챙이를 입에서 떼지도 않은 채 부목을 대어 고정한 다른 팔을 보란 듯 조금 내밀었다.


흐흥 하고 말리티아가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난 이제 곧 죽을 텐데 입가의 검댕이야 아무려면 어떨까요.”


볼멘소리를 하면서 시스는 생선을 입에 우겨넣었다. 말리티아를 떠보는 것이었다. 자신을 언제쯤 죽이려는지, 죽기 전에 자신이 겪게 될 일들은 어떤 건지, 대강이나마 가늠해볼 수 있는 대답이 나오기를 바라면서.


“사실 이제 곧은 아닐 게다만, 앞으로의 상황이 어떻든 너는 오래 살지 못한단다. 불행하게도 데세르가 너에게 건 주술이 정교하지를 못했거든. 초보 흑주술사들이 흔히 하는 실수지.”


매정하고 솔직하게 그리고 얄미울 만큼 명랑하게 말리티아가 털어놓았다.


“그 말은…… 누가 일부러 죽이지 않아도 내가 죽게 되어 있다는 말이군요. 그럼 얼마나, 남은 시간은 얼마나 되나요?”


혈색이 사라진 창백한 얼굴로 시스가 물었다. 그녀의 머릿속도 낯빛만큼이나 새하얬다. 이렇게 허무하게 내 삶이 끝나가고 있다고? 시스는 들고 있던 생선을 떨어뜨렸다. 넘기지 못하고 입안에 남은 생선살이 별안간 역겨웠다. 시스는 고개를 돌리고 구역질을 했다.


“정확히는 나도 모른다. 짧으면 열흘에서 보름쯤? 길게 잡아도 앞으로 한 달은 안 될 걸?”


“싫어. 난 죽기 싫어.”


시스는 억울하고 분했다. 그리고 그보다 더 절실하게, 살고 싶었다. 지금까지 살아남기에 급급했는데, 그러느라 삶이라는 걸 충분히 음미하지도 못했는데. 머지않아 자유로운 내 삶을 찾아 떠날 수 있었는데. 곧 죽어야 한다고?


“희망을 좀 갖지 그래? 넌 아주 순수한 피를 가졌으니. 만약 네 피가 내 예상보다 더 특별하다면 널 살려 두자는 결정이 내려질지도 모르니까.”


깔끔하고 우아하게 생선을 발라 먹으면서 말리티아가 한쪽 눈을 찡긋했다.


시스로서는 전혀 위로가 되지 않는 말이었다. 자신을 도구나 재료로 취급하는 듯한 불쾌한 느낌이 들었다. 시스는 석상처럼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어느새 본격적인 어둠이 물밀어들었고 그녀의 마음은 밤보다 더 캄캄했다.


“공작 부인은 내가 좀 모시고 가야겠는데?”


어두운 숲 어딘가에서 느긋한 목소리가 날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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