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야. 나는 마물이 아니야.”
정체 모를 생명체가 이마 가운데에 있는 커다란 외눈을 깜빡이며 울상을 지었다. 팔은 둘이지만 눈과 다리는 각각 하나씩이었고 키는 사람 꼬마만 했다. 나무껍질을 엮어 만든 것 같은 옷을 입었는데 드러난 피부색이 풀빛이었다. 그러니까 얼굴도 팔다리도 봄풀 같은 초록색.
눈물이 글썽거리는 외눈을 들여다보던 말리티아가 아뿔싸 눈을 피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마물인지 뭔지를 따라 그녀의 마음도 슬프고 답답해졌다. 저것의 술수에 걸려들었구나! 말리티아가 본능적으로 저것으로부터 멀찍이 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이름이 뭐야?”
그것이 물었다.
“말리티아.”
홀린 듯 멍하니 대답하면서 말리티아는 일이 단단히 잘못되어 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말리티아. 이리 와. 나랑 같이 놀러 가. 말리티아, 어서 어서 이리로. 말리티아, 말리티아. 여기야.”
풀빛의 생명체가 뒤돌아 하나뿐인 다리로 콩콩콩 뛰어가며 말했다. 말리티아는 따라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소용없었다. 자신도 모르게 허둥지둥 그것을 뒤따라가고 있었다.
‘빌어먹을 마물 같으니라고!’
속으로 온갖 욕을 퍼부으면서 말리티아는 가시덤불 속을 통과하고 뾰족돌이 깔린 시냇물에 빠지고 쓰러진 나무 등걸에 걸려 엎어지고 습지를 굴렀다. 그렇게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를 쫓아다녔다. 얼굴과 손은 상처투성이가 되고 발목을 삐었으며 신발도 한 짝 잃어버렸다.
풀빛의 그 생명체는 손 하나 까딱 않은 채 말리티아를 험하고 외진 곳으로 끌고 다녔다. 시스에게 흑주술을 걸어 조종하던 말리티아가 이번에는 조종을 당하는 입장이 된 것이다. 그러나 못돼먹은 말리티아는 자신의 고통만 억울하고 분했지 시스의 심정은 헤아릴 줄 몰랐다.
어느새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말리티아는 비로소 발을 멈출 수 있었다. 그녀는 털썩 주저앉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울창한 나무 사이로 어슴푸레한 밤하늘이 언뜻언뜻 보였다. 갈고리달이 떠 있었지만 숲속은 깜깜했다.
“시스! 시스! 냉큼 이리 와서 날 데려가라. 시스!”
고래고래 외쳤지만 메아리조차 들려오지 않았다. 빽빽하게 둘러싼 나무와 덤불이 그녀의 목소리를 먹어 버리는 것만 같았다. 화를 못 이겨 씩씩거리던 말리티아는 물소리를 들었다. 폭포가 떨어져 내리는 소리와 물 흐르는 소리. 그렇다면 근처에 계곡이 있다는 뜻이었다.
말리티아는 부어오르고 아픈 발목을 질질 끌면서 폭포 소리가 나는 쪽으로 향했다. 억센 가시나무와 질긴 덩굴이 뒤엉킨 수풀이 그녀를 가로막았다.
한편 서로가 원치 않는 고단하고 지루한 공격과 방어를 거듭하던 시스와 라무스는 갑작스러운 끝을 맞았다. 아까 말리티아가 황망히 어디론가 달려가는 것을 두 사람은 힐긋 보았는데 그로부터 얼마 뒤 시스가 돌연하게 쓰러진 것이었다.
그때까지 보이지 않던 페로가 어둠을 뚫고 날아와 시스의 주변을 우왕좌왕 맴돌았다.
“이봐 시스. 괜찮아?”
땅에 널브러진 시스를 반듯이 눕힌 라무스가 말을 걸었다. 그는 야광석을 꺼내 시스의 얼굴에 바투 비추면서 또렷이 뜨고 있는 눈과 거칠기는 해도 안정적인 호흡을 확인하고는 일단 안도했다.
“괜찮으면 좀 일어나지?”
시스는 눈만 겨우 깜빡일 수 있었다. 움직이거나 말을 하거나 표정을 짓는 건 아무리 애써도 불가능했다. 말리티아가 일정 거리 이상 멀어진 거구나. 겨우 그녀에게서 벗어났는데 살아 있는 인형 신세라니. 시스는 절박한 눈으로 라무스를 보며 속으로 불평했다.
‘안 괜찮아. 안 괜찮다고. 안 일어나는 게 아니라 못 일어나는 거라고!’
이상하다는 걸 느낀 라무스가 시스의 다치지 않은 팔을 들어 올리고는 손을 놓았다. 그녀의 팔은 물건이 떨어지듯 아래로 툭 떨어졌다.
“못 움직이는군. 말도 못하는 거지? 수긍하면 눈 한 번 깜빡, 부정은 두 번.”
어두워진 낯빛으로 라무스가 말했다. 시스는 눈을 한 번 깜빡했다.
“이게 다 흑주술 때문인 거고?”
시스는 눈을 깜빡여 그렇다고 대답했다.
“죽어가고 있다는 것도 사실인 거지? 시간은 얼마나 남았어? 며칠 내외?”
‘아니.’
“그럼 며칠보다는 긴가?”
‘응.’
“열흘쯤?”
‘대강 그쯤으로 해 두자고.’
시스가 눈을 한 번 감았다 떴다.
“그것 참, 악랄한 흑주술이군.”
라무스의 목소리가 한층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는 심각한 표정으로 고심한 끝에 물었다.
“혹시 아까 그 늙은이를 따라가면 목숨을 구할 수 있나?”
‘아니!’
시스가 눈을 두 번 단호하게 깜빡거렸다. 그러고는 복잡하고 간절한 눈빛으로 라무스를 지긋하게 응시했다.
‘무슨 방법이 없을까? 나, 이대로 죽기는 싫어. 당신이 구해줄 수 없어? 날 살려주면 가짜 신랑 노릇한 거 용서해줄게.’
마음의 소리를 알아들은 페로가 라무스의 눈앞으로 날아올라 날개를 휘적휘적하면서 시스를 대신해 그에게 전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뭐라고? 기왕 이렇게 된 거 그냥 두고 가라고?”
‘젠장! 페로! 네 노력은 가상하지만 전혀 알아먹질 못했잖아! 저 인간은 나만큼 감이 좋지가 않단 말이야.’
미치도록 답답한 시스의 소리 없는 푸념에 페로는 풀이 폭 죽어 한쪽 구석으로 물러났다. 깃털이 축 처져서는 머리를 가슴에 묻더니 몸이 들썩이도록 한숨을 쉬었다.
“우선은 여기를 떠나자. 그 늙은이가 돌아오기 전에.”
라무스가 시스의 상체를 일으켰다. 그녀를 안아 들려는 것이었다.
“내가 안고 갈게.”
낯선 목소리가 느닷없이 끼어들었다. 라무스와 시스는 동시에 동공이 커졌다. 두 사람의 앞에 어디서 어떻게 나타났는지 모를 푸른 풀빛의 아이 하나가 서 있었다. 외눈에 외다리를 가진 아이는 분명 인간과는 다른 종족이었다. 그러나 하나밖에 없는 큰 눈이 순하고 맑았다.
“네가? 시스를?”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닌가 싶어 라무스가 확인했다. 풀빛 피부를 가진 아이는 크고 포동포동한 얼굴을 주억거렸다.
“그래, 내가. 케노가 시스 돌본다. 시스는 좋은 사람, 말리티아는 나쁜 사람. 나쁜 말리티아는 오늘밤 안에는 못 돌아온다. 내가 그렇게 만들었다. 날이 밝아야 풀린다. 별로 대단한 재주는 아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