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참 동안 빛은 돌아오지 않았다. 시스는 가만히 귀를 기울였지만 인기척은커녕 그 비슷한 것조차 들을 수 없었다. 귀에 들리는 건 타닥타닥 모닥불 타는 소리와 잠든 말리티아의 숨소리가 다였다.
잘못 본 거였나. 왠지 모르게 조금 힘이 빠진 시스는 이만 눈을 감고 잠을 청하기로 했다. 눈을 반쯤 감은 찰나에 빛이 빼꼼 보였다. 시스는 눈을 크게 뜨고 그것을 마주보았다. 그것은 저 앞의 거목 뒤에 숨어 살짝 이쪽을 내다보는 듯한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시스가 가만히 주시하자 눈이라도 마주친 것처럼 그것이 흠칫했다. 놀랐나 싶어 시스가 살며시 웃어 보였다. 그러자 그것이 슬금슬금 나무 뒤에서 날아 나왔다.
그것은 불꽃, 초록색의 불꽃이었다. 평범한 불꽃이 아님은 한눈에도 알아볼 수 있었다. 빛깔도 빛깔이거니와 나무에 옮겨 붙지도 않고 마른 가지를 태우지도 않았다.
시스는 초록 불꽃을 향해 안심하라는 뜻으로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상긋 웃어 주었다. 그랬더니 초록 불꽃에 대충 그린 듯한 두 개의 눈과 입이 생겨나 시스를 따라 웃는 것이 아닌가. 비록 눈은 두 개의 점, 입은 하나의 선이었지만 표정을 짓기에는 충분했다.
귀린鬼燐? 아마 그런 쪽인가 보았다. 무덤이나 고목에서 나타난다는 푸른 불꽃. 시스는 세쿤도에게서 빌린 책에서 읽은 적이 있다. 귀린을 본 인간이 지레 겁을 먹는 것이 문제지 딱히 인간에게 위해를 가하는 것은 아니라고.
‘해치지도 않지만 나를 구해줄 수도 없겠지?’
초록 불꽃이 조금 가까이로 날아왔다. 시스는 고개를 돌려 말리티아의 동태를 살폈다. 완전히 잠들었는지 숨소리가 규칙적이었다. 시스는 초록 불꽃을 향해 안심해도 된다는 뜻으로 손가락 두 개로 동그라미를 만들었다. 그러자 초록 불꽃도 같은 모양을 만들어 보였다.
이번에는 시스가 말리티아를 가리킨 다음, 저 사람은 나쁜 사람이라는 뜻으로 눈을 부릅뜨고 무서운 얼굴로 이를 드러냈다. 초록 불꽃은 알았다는 뜻으로 끄떡끄떡했다.
‘제법 뜻이 통하는구나. 재미있는 녀석이야.’
시스는 손을 들어 허공에다 썼다.
‘넌 누구니?’
초록 불꽃은 팔 모양을 만들어 팔짱을 끼더니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다는 건지, 글자 자체를 모른다는 건지 시스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시스는 다시 밤공기 속에다 적었다.
‘나는 시스.’
방금 전과 똑같이 도리도리하는 초록 불꽃을 향해 시스는 입 모양으로 ‘그렇구나.’ 대답하고는 ‘어쨌든 만나서 반가워.’라고 덧붙였다.
고심하는 듯 망설이는 듯 얼마 동안을 저만치에서 서성이던 초록 불꽃이 느릿느릿 시스에게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귓가에 속삭였다.
“케노, 내 이름은 케노. 나는 원래…….”
케노가 여기까지 말했을 때 말들이 깨어 힝힝거렸고 그 소리에 말리티아가 깨어 버렸다. 케노는 당황한 듯 순식간에 어디론가 모습을 감추었다.
“시스. 말들이 왜 놀랐는지 살펴보고 와.”
“산짐승이라도 지나갔겠죠.”
말들이 케노 때문에 겁을 먹었다는 걸 아는 시스는 태평했다.
“보고 오라면 보고 와. 자꾸 그런 식으로 말대꾸하면 도로 말을 못하는 상태로 만들어 버릴 테니까.”
“가요, 가.”
모포에서 빠져나온 시스가 말들에게로 갔다. 그녀는 말 두 마리의 목을 부드럽게 쓸어 주며 안심시켰다. 말들은 곧 안정되었다.
“말들은 괜찮아요. 주위에 별다른 이상한 낌새도 없고. 그런데 한 가지만 물어봐도 될까요?”
다시 모닥불 곁으로 돌아간 시스가 말했다.
“말해 봐.”
“난 죽게 되나요? 지금 당신이 가려고 하는 그곳에 도착하면 말이에요.”
“네가 어떻게 쓰일지는 나도 잘 모른단다. 하지만 아마도 결국에는……?”
묘한 즐거움과 기대가 말리티아의 눈에서 번들거렸다.
“거기에서 당신을 기다리는 건 누구예요?”
“한 가지만 묻는다며? 쓸데없는 생각 말고 잠이나 자 둬라.”
시스는 누웠다. 멀고 높은 나뭇가지 사이로 케노가 보였다. 하지만 케노는 가까이 다가오지 않았다. 시스는 오래 뒤척이다 겨우 잠들었다.
“일어나라, 시스.”
말리티아가 발로 툭툭 건드리면서 깨우는 통에 시스는 기분 나쁘게 잠에서 깼다. 하늘을 보니 먼동이 희붐했다. 머지않아 날이 밝을 모양이었다.
“물.”
철제 수통을 내밀면서 말리티아가 짧게 명령했다. 시스는 묵묵히 수통을 들고 석굴의 가장 안쪽으로 들어갔다. 바위 틈새에 수통 입구를 대고 가느다랗게 흘러내리는 물을 모았다. 그렇게 수통을 어느 정도 채워 석굴을 나서려던 시스는 깜짝 놀라 멈춰 섰다.
가장자리에 뼈 같은 것이 땅속에서 비죽 튀어나와 있었다. 아주 오래돼 보였고 사람의 손가락 뼈 같았다.
무섭지는 않았다. 시스는 속으로 유골을 향해 인사했다. 지난밤에는 본의 아니게 신세를 졌습니다.
“시스, 물 다 받았으면 빨리 와서 불에 올려라. 몸이 으슬으슬한 게 따뜻한 물이라도 좀 마셔야겠다.”
말리티아가 손짓했다. 시스는 아무 일 없었다는 얼굴로 뛰어갔다. 그 사이 불을 피운 말리티아가 주변에서 주운 자질구레한 땔감을 넣고 있었다.
“그건 안돼요.”
막 불 속으로 던져 넣으려던 긴 나무 막대기를 시스가 빼앗아서 멀리 수풀 속으로 던져 버렸다. 말리티아는 어이없는 얼굴로 시스를 흘겼다.
“뭐하는 짓이니?”
“예?”
“멀쩡한 땔감을 왜 던져 버리냐고?”
“제가 그랬나요? 왜 그랬을까요?”
시스는 제정신이 아닌 사람처럼 흐리멍덩하게 중얼거렸다. 진짜 그런 것이 아니라 그런 체하는 것이었다.
“정신 차려라. 얘, 얘. 흐음, 알겠다. 물 뜨러 갔다가 인골을 본 게로구나. 별것 아니다. 그저 오래된 뼈일 뿐이야.”
“맞아요. 뼈, 뼈를 보고 놀라서…….”
시스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던져 버린 막대기에 말리티아가 더는 관심을 두지 않아서 다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