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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정말 마물이었을까?

by 화진


부목을 대 놓은 다친 팔이 욱신거리는 건 신경 쓸 거리조차 못 되었다. 종일 말을 달리거나 걸어서 피곤한 것 역시 좀 자거나 쉬고 나면 거짓말처럼 회복되었다. 정작 지쳐 가는 건 마음이었다. 보이지 않는 속박에 얽매여 끌려 다니는 일에 시스는 진력이 났다.


휘진 마음에서는 이전에 시스를 빛나게 했던 의지와 동력, 낙관과 희망 같은 것들이 자꾸만 새어 나갔다. 그것들이 빠져나간 빈 자리를 형체 없는 무게가 채웠다. 시스의 마음은 점점 무거워졌다. 마음의 무게는 뜻밖으로 실재적이어서 그것을 안고 다니기가 나날이 힘들어졌다.


어쩌면 이대로 끌려가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지도 몰라. 이런 생각이 들자 시스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어 부정했다. 아니야, 그렇게 되고 싶지 않아. 그럴 리 없어!


시스는 머리카락 몇 가닥을 뽑아 바위틈에 끼워 놓았다. 스스로를 향한, 포기하지 않는다는 다짐 같은 행위였다.


말리티아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이제 시스도 눈치를 챘다. 산 아래로 내려가지 않고 계속 북진하고 있으니 어림잡아 며칠쯤 더 가면 웬투스 고원이 나올 터였다. 고원 가장 깊숙한 곳에 그 옛날 팔라키아 라크리모가 마물들을 토벌한 이래로 버려진 폐허가 된 옛터가 있었다.


시스가 오티움의 고대문학 교수인 세쿤도에게 들은바 마물들의 폐허에 들어갔다 살아나온 사람은 없다고 전해졌다. 세쿤도 교수와 이른바 마물이라는 것에 대해 의견을 나누던 중 시스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접했다.


마물이라는 존재를 우연히 마주쳤던 사람들의 엇갈린 증언들과 의문점에 대한 것이었다. 세쿤도는 말했었다.


“그 옛날 그들은 고래 산맥 뿐 아니라 티토니아의 다른 산속에서도 종종 출몰했다네. 그런데 흥미로운 건 밤중에 산길을 가다 우연히 그들을 만났던 사람들이 그들을 무섭고 기분 나쁜 존재가 아니라 단순한 장난꾸러기로 기억했다는 거네. 밤 내내 그들에게 이끌려 수풀 사이를 헤매 다녔다거나. 팔씨름을 하자고 해서 사람이 이기면 길을 알려주면서 순순히 보내주고 지면 밤새도록 다시 하자고 졸랐다거나. 같은 방향으로 가는 동행인 척 접근하더니 마른 말똥을 빵이라고 속여 먹게 했다거나. 그런 장난을 칠 뿐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고.”


듣고 있던 시스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왜 그들을 마물이라 하여 잔혹하게 토벌하게 되었느냐고.


“그 시기를 즈음해서 사람들이 그들에 대해 예전과 다른 증언을 하기 시작했다네. 가족이 그들에게 잡혀가 제물로 희생되었다거나. 그들이 아이를 유괴해 가서 잡아먹는다거나. 그들이 마을로 내려와 여자들과 동침하여 마물의 씨를 퍼뜨린다거나. 그런 흉흉한 얘기들이었네.”


세쿤도는 마물이라는 말 대신 줄곧 그들이라고 표현했다. 시스는 이 점에 주목했고 다시 물었다. 교수님께서는 그들이 마물이 아니라고 생각하시는 거죠? 설령 마물이라 하더라도 본성은 나쁘지 않은 존재라고. 그렇죠?

인자한 세쿤도의 얼굴에 잔잔한 웃음이 번졌다.


“흠…… 하여튼 그들 중에는 우리와 다르지 않은 형상을 한 자들도 있었고 좀 다른 형상을 한 자들도 있었다고 하더군. 다리가 하나뿐이라든가. 눈이 하나뿐이라든가. 피부색이 파랗다든가. 그런 식으로. 확실한 사실로 밝혀진 건 아니네. 혹자는 그들에게 변신의 능력이 있어서 단지 사람을 골려 줄 의도로 그런 모습으로 나타나는 거라고 주장하기도 했으니.”


웬투스 고원의 마물 소탕에 대해 세쿤도는 의혹을 품고 있는 듯했다. 시스도 그 사건이 석연치 않아 보였다. 알려진 것과 전혀 다른 내막이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둘 다 그런 말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마물들의 폐허에 대한 두 사람의 대화는 거기까지였다. 사건의 가장 중요한 당사자 팔라키아는 페르베아투의 왕가 라크리모의 조상이었다. 이제 와 함부로 건드리거나 파헤치기에는 부담스러운 사안이었다.


앙켑세라의 시니컬한 얼굴이 떠올라 시스는 서글픈 눈으로 웃음을 지었다. 시스가 아는 걸 그녀가 알았다면 냉소를 띠며 거침없이 단언했겠지.


‘팔라키아 라크리모의 암중공작이 아닐 리 없어! 그러니까, 그는 마물들이 소유한 뭔가를 빼앗아 가지기 위해 그들을 사악한 마물로 몰아간 것이지. 그 사건 이후로 라크리모 가가 부유해지고 번창한 건 사실이잖아?’


생각에 골몰해 있던 시스가 갑자기 고개를 들어 석굴 밖을 응시했다. 방금 뭔가 어른어른한 빛 같은 것이 지나갔는데…….


“으…… 추워라. 시스, 시스!”


잠이 깬 말리티아가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불러댔다.


“모닥불이 꺼졌잖아. 어서 일어나. 나뭇가지들을 모아서 다시 불을 피우거라.”


말리티아는 상체를 일으키더니 시스의 다친 팔을 툭툭 치며 다그쳤다. 시스는 묵묵히 일어나 석굴 밖으로 나가 미적미적 마른 가지를 주웠다.


시스는 줄곧 깨어 있었으니 모닥불의 상태를 알고 있었다. 사실은 일부러 꺼지도록 놓아두었다. 시스는 추위에 무척 강했다. 그녀는 추위로 말리티아를 골탕 먹이고 싶었던 것이다.


“빨리빨리 하지 못하고 어찌 그리 느려 터졌어?”


어깨를 움츠리며 말리티아가 짜증을 냈다.


“한 팔로 하잖아요! 어둡기도 어둡고! 야광석으로 바닥을 일일이 비춰 보면서 찾고, 찾으면 또 야광석 내려놓고 그 손으로 주워 날라야 하고. 이런 꼴로는 쉽지 않다고요.”


답답하면 당신도 좀 거들든가! 마지막 말과 욕은 참았다. 불평도 정도껏 해야지 지나치면 말리티아가 다친 팔을 때려 괴롭힌다는 걸 경험으로 배웠기 때문이다.


땔감을 모으면서도 시스의 시선은 기민하게 주변을 살폈다. 아까 본 빛을 찾기 위해서였다. 순간적이기는 했어도 분명히 보았다. 불꽃 비슷한 것이 빠르게 휘익 지나가는 것을.


얼추 한 무더기의 나무를 모은 시스가 다시 모닥불을 피웠다. 불을 쬐던 말리티아는 곧 다시 잠들었다. 시스는 석굴 입구를 향해 누워 숨을 죽인 채 빛이 다시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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