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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등황빛 머리카락

by 화진


푸드덕하고 페로가 라무스에게로 날아왔다. 시스라는 이름에 반응한 것이었다.


“너, 시스를 잃어버렸던 거야? 그녀를 찾아 헤매던 중이었던 거냐?”


탁자에 앉아 빤히 바라보는 새에게 라무스가 말을 걸었다.


그게 아니라는 뜻으로 페로는 몸을 옆으로 도리도리 움직였다. 페로는 우연히 고래 산맥에서 라무스를 발견하고는 그가 시스를 도와주기를 원했던 것이다. 페로가 그의 얼굴을 가로막으면서 행로를 방해했던 것도 그가 시스와 더 멀어지는 방향으로 가고 있었던 탓이다.


그러나 라무스에게는 페로와 정신으로 감응하는 능력이 없었으므로 페로는 자신의 뜻을 그에게 이해시킬 수가 없었다.


“고대 문자가 같이 씌어 있는 걸로 보면 저 숯 글자는 시스가 직접 썼을 가능성이 높아. 고대 문자를 저렇게 능숙하게 쓸 사람은 그리 흔치 않으니 말이야. 그런데 납치라니 누가, 왜 그녀를?”


말이 통할 리 없는 새를 상대로 주절주절 얘기하던 라무스는 혀를 차며 쓴입을 다셨다. 스스로가 어이없고 한심하게 여겨졌다. 저 이상한 새 녀석이 사람을 이상하게 만드는군. 라무스는 새를 들어 침대 쪽으로 날렸다. 새는 곧바로 몸을 돌려 탁자에 도로 안착했다.


페로는 페로대로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왜 저 인간은 내 뜻을 저토록 못 알아먹는 걸까. 탁자 위에서 몸을 데굴데굴 굴리거나 날개를 이리저리 치면서 페로는 시스가 처한 상황을 열심히 설명했다.


여전히 영문 모를 눈길로 쳐다보던 라무스는 상관 않겠다는 듯 눈을 감아 버렸다. 체념한 페로는 깃털이 축 쳐져서는 그대로 탁자 위에 움츠려 앉아 머리를 숙였다. 그 모습은 바람 샌 공 같기도 하고 녹아가는 눈사람 같기도 했다.


‘내일 새벽에 시스를 찾아보고, 못 찾으면 아비움과 칸나를 슬쩍 떠봐야겠어. 나쁜 짓을 저지를 사람들로는 보이지는 않지만, 확실히 짚고 넘어가는 게 좋겠지. 어쨌든 저 부부의 소행이 아니라 해도 저 글자가 시스의 것이라면 그녀가 여기에 왔던 건 분명해.’


난로에 장작을 더 던져 넣은 라무스는 처량하게 옹송그린 채 자는 페로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만개하는 불꽃이 발하는 온기가 그에게도 곧 노곤한 잠을 선물했다.


이튿날 꼭두새벽에 일어난 라무스는 밤 동안 잘 마른 옷을 민첩하게 주워 입고 그림자 인간인 듯 소리 없이 밖으로 나갔다. 혹시 모를 경우의 수를 염두에 두고 주위를 샅샅이 살펴보려는 것이었다.


두 채의 오두막과 헛간 그리고 거위 우리에 주변의 숲까지 빈틈없이 조사했으나 허사였다. 시스의 흔적이나 사람을 숨길 법한 비밀스러운 공간 같은 건 나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아비움과 칸나에 대한 의심을 완전히 거둔 건 아니었다. 다른 장소에 감금했을 수도 있으니까.


이른 아침 식사 자리에서 라무스는 어제 저녁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호사스러운 대접을 받았다. 식탁 위에는 거칠지만 갓 구운 빵, 석벌의 꿀, 소금에 절여 말린 거위 고기와 체리절임까지 놓여 있었다. 어제 건네준 녹스 여신 은화에 대한 답례였다.


“석벌의 꿀과 체리절임…… 시스가 참 좋아하는 건데.”


느긋하게 식사를 하던 라무스가 의도적으로 지어낸 말을 중얼거렸다. 태연함을 가장하고 있었지만 그의 모든 신경은 칸나와 아비움의 반응에 첨예하게 곤두서 있었다.


“여동생 생각이 나셨나 보네요. 자상도 하셔라.”


칸나가 호감 어린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따로 더 내어드릴 순 없어요. 우리도 특별한 날에나 겨우 먹는 거니까.”


아비움은 무뚝뚝하게 말하면서도 겸연쩍은 낯빛이 되었다.


“그런 뜻이 아닙니다. 무심코 나온 소리인 걸요.”


라무스가 아비움을 향해 허둥지둥 손을 내저었다. 저들은 시스라는 이름에 일말의 동요도 별다른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 이름을 모르는 것이다. 그럼, 과연 그녀를 본 적도 없을까?


“최근에 옆채에 여자 손님이 들었었나 봅디다. 창의 덧문 틀에 등황빛의 기다란 머리카락이 끼어 있더군요.”


머리카락이 나왔다는 건 거짓말이었다. 자, 이제 당신들은 어떻게 나올까? 시스를 봤다면 그녀의 머리색이 등황빛이라는 걸 알 텐데. 라무스는 무심한 척 빵에 꿀을 바르며 아비움과 칸나의 대답을 기다렸다.


“머리카락? 이럴 수가…… 분명 꼼꼼하게 청소를 했는데. 며칠 전에 노 귀부인 일행이 묵어 가셨거든요.”


칸나가 조금 민망해 하며 대답했다.


“그러고 보니 그 마님의 친척이라는 젊은 레이디의 머리칼이 등황색이었지. 칸나 당신도 이제 늙어서 눈이 예전 같지 않나 보군. 청소하면서 머리카락도 제대로 못 보고……”


아비움이 놀리듯 말하며 혼자 웃었다. 칸나는 아비움을 가볍게 흘겼다.


부지런히 식사를 하면서 라무스는 주의 깊게 부부를 관찰했다. 그들은 당황하지 않았고, 굳이 숨기려 하지 않았으며, 언행이 자연스러웠다. 역시 납치 같은 악행과는 어울리지 않는 산사람들이었다. 정황상 시스와 동행했다는 노 귀부인에게 혐의가 돌아갔다.


그런데 노부인이 어떻게 시스를 제압해 함께 이동할 수 있었을까? 아니지, 시스는 왜 그 노부인을 순순히 따라갈 수밖에 없었던 걸까? 도와달라는 글귀를 남긴 것으로 보아 납치임에는 틀림없는데.


라무스의 의문에 실마리를 제공해준 것은 아비움이었다.


“예쁜 레이디였는데 아예 말을 못한다더군요. 날 때부터 그랬는지 병 같은 걸 앓아서 그렇게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참 안됐더라고요. 팔까지 다쳐서 왔기에 칸나가 치료도 해줬어요. 칸나가 뼈를 좀 만질 줄 알거든요. 그렇지, 칸나?”


아비움의 순박한 말투에서 칸나에 대한 자부심이 배어났다.


“맞아요, 그랬지요. 팔에 부목을 해줬더니 레이디가 내 손바닥에 대고 뭐라고 글자를 적었는데, 고맙다는 말이었을 거예요. 괜찮다고, 우리도 그 노마님께 크게 신세진 적이 있으니 마음 쓰지 말라고 말해 줬지요. 굳이 글을 모른다고 털어놓지는 않았어요.”


칸나가 기분 좋게 부연하며 별일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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