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무스는 표정과 끄덕임으로 대충 부부의 기분을 맞춰 주면서 생각했다. 시스가 썼던 글자는 ‘도와주세요’였을 거야. 친절하지만 전혀 엉뚱한 칸나의 대답을 듣고 그녀는 무척 낙담했겠군. 저 부부가 까막눈이라는 것을 알았으니.
그나저나 귀부인인지 납치범인지는 시스에게 무슨 짓을 해서 그녀를 말 못하는 사람으로 만들었을까?
예감이 좋지 않았다. 라무스의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는 서둘러 아침 식사를 끝냈다. 어서 빨리 시스의 흔적을 쫓아가야 했다.
“덕분에 편히 묵고 갑니다. 날이 개었으니 바로 떠나겠습니다.”
식탁에서 일어서자마자 라무스는 아비움과 칸나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여신의 가호가 함께 하시기를.”
아비움이 말하고 칸나가 웃으며 끄덕였다.
자신이 묵었던 방으로 가서 단출한 짐을 챙기던 라무스는 무언가가 빠졌다고 느꼈다. 그는 머리를 갸웃거리며 방을 구석구석 둘러보았다. 새, 희고 둥글고 이상한 그 새가 없어졌다. 그가 방을 나갈 때까지만 해도 침대 위에서 자고 있던 녀석이 어디론가 가 버린 것이다.
‘내가 문을 제대로 닫지 않았었나 보군.’
문밖으로 나온 라무스는 고개를 쳐들고 제자리에서 빙글 돌며 하늘을 한 바퀴 살폈다. 연푸르게 맑은 하늘에 새하얀 구름 몇 조각이 떠 있을 뿐 새라고 생긴 것은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허전할 것도 아쉬울 것도 없었다. 날개가 있는 녀석이고, 애초에 자신과 상관없는 녀석이었다. 오고 싶으면 오고 가고 싶으면 갈 테지. 라무스는 미련 없이 발길을 뗐다. 그는 헛간으로 가 말을 데리고 나왔다.
라무스는 일단 북동쪽으로 길을 잡았다. 여러 가지를 사실들을 조합해 그가 추론해낸 방향이었다.
시스와 납치범은 타키툼 즉 서쪽에서 이리로 왔다. 텔룸이나 페르베아투로 갈 거였으면 타키툼에서 북쪽으로 난 가도를 따라가는 편이 훨씬 빠르고 수월하다. 그러니 그들의 목적지는 다른 곳일 터였다.
남서쪽을 제외한 것은 라무스 자신이 그쪽에서 올라왔기 때문이었다. 오는 동안 몇 번쯤 키 큰 나무에 올라가 주위를 살폈지만 부근에서 말이나 사람의 기척이나 모습을 발견한 적은 없었다.
길이라고 할 수도 없는 숲 사이를 헤쳐 나가면서 라무스는 시스 일행이 남겼을 자취를 찾기 시작했다. 그는 찍힌 지 얼마 되지 않을 말발굽 자국이나 발자국이 있는지, 꺾이거나 쓸린 지 얼마 되지 않은 나뭇가지가 있는지 면밀히 살폈다. 그러느라 출발하고 한참 동안은 그가 말보다 앞서 걸었다.
좌우로 왔다갔다 수색하며 나아가던 라무스는 마침내 말발굽 자국을 발견했다. 앞을 가로지르는 작은 실개울의 이쪽과 저쪽에 낙엽이 덮이지 않고 드러난 진흙땅이 있었는데 말의 발굽 모양이 아직도 꽤 선명했다. 보아 하니 말은 두 마리였다.
그들이 이 실개울을 넘어갔다고 봐야 했다. 라무스는 실개울을 훌쩍 뛰어넘었다. 말은 느긋하게 실개울의 물을 첨벙 밝으면서 그를 따라왔다. 땅바닥의 자국은 이내 낙엽 사이로 사라졌지만 얼마간 더 가자 좁은 나무 사이에서 그들이 부러뜨렸을 잔가지를 볼 수 있었다.
그 가지는 채 다 마르지 않아서 풋내가 났다. 부러진 지 그리 오래 되지 않은 것이었다. 새끼손톱보다도 조그마한 잎이 돋기 시작한 활엽수와 뾰족뾰족한 잎이 무성한 침엽수가 뒤섞인 초봄의 숲으로 해가 비쳐 들었다.
머리 위로 드리운 침엽수의 이파리 뭉치 사이에서 무언가가 반짝 라무스의 시선을 빼앗았다. 라무스는 말 등에 올라앉았다. 그러자 반짝이는 것이 걸린 가지가 그의 눈높이보다 한 뼘 정도 아래에서 흔들렸다.
머리카락이었다. 바늘잎에 낀 한 가닥 등황빛 머리카락이 햇빛을 받아 금실처럼 빛났다. 라무스는 그것을 조심스레 빼냈다.
시스의 것이라고 그는 확신했다. 그가 아는 누구도 이런 머리색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시스의 등황색 머리는 단순한 금발과 달랐고, 붉은 기나 갈색 기가 도는 금발과도 달랐다. 말 그대로 오묘한 등황빛이었고 빛의 종류와 각도에 따라 은은하고 다채로운 빛을 발했다.
라무스는 말을 탄 채로 계속 나아갔다. 이따금씩 발견되는 종적을 신중하게 따라가던 그는 바위 사이에서 솟아나는 샘을 발견했다. 잠시 쉬어가기로 한 그가 말에서 내려 샘으로 갔다. 그는 샘에서, 말은 샘 아래쪽 웅덩이에서 물을 마셨다.
샘 주위로는 아무런 흔적도 없었다. 그들은 여기에서 쉬어가지 않은 것이다. 라무스는 곧바로 다시 출발했다.
저물녘이 되자 그는 밤을 지내기에 적당한 바위 사이를 찾아 그리로 들어갔다. 그가 짐바리에서 칸나가 싸 준 말린 거위 고기를 몇 개 꺼내 씹는 동안 말은 알아서 풀이나 잎을 찾아 뜯어 먹었다.
머릿속으로 고래 산맥의 지형과 자신이 가고 있는 방향을 그려보던 라무스가 고기를 씹던 것도 잊고 생각에 잠겨 팔짱을 끼었다.
마물들의 폐허!
이 방향으로 가면 결국 닿을 곳은 거기였다. 시스는 마물들의 폐허가 있는 웬투스 고원으로 잡혀가고 있는 것이다.
시스를 납치한 건 사사로운 이유가 아니야. 라무스는 어렴풋이 깨달았다.
마물들의 폐허는 멀쩡한 사람이 발을 들일 장소가 아니었다. 아무래도 시스가 뭔가 꺼림칙하고 무서운 암계에 휘말린 것 같았다.
*
옆에서 잠든 말리티아의 고른 숨소리가 들려왔다. 별도 달도 보이지 않는 흐린 밤이어서 작은 암굴 안도 칠흑처럼 어두웠다.
시스는 불안과 초조, 분노와 상심으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나마 말리티아가 잠든 틈을 타 가까이 다가온 페로의 따스한 체온이 그녀의 유일한 위안이었다.
아무리 해도 말리티아에게서 벗어날 길이 보이지 않았다.
아비움과 칸나는 말리티아의 악한 본성을 모르는 채 그녀를 은인으로 모시는 데다 글을 몰랐다. 꺼진 난로에서 주운 숯으로 탁자에 도와 달라는 문구를 써 놓긴 했지만 그걸 누군가가 읽을 확률도, 읽는다 해도 그게 진짜 구조 요청이라고 여길 확률도 극히 희박했다.
쉬이 절망하지 않는 것이 자신의 가장 큰 장점인 줄 알았던 그녀는 그 생각에 대해 점점 자신감을 잃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