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아, 시스는 번개 반도를 떠올렸다. 그곳과 이쪽 땅의 서로 다른 시간의 흐름을 몸소 체험했던 시스였기에 단 하루라는 미세르 공주의 말을 마냥 의심할 수만은 없었다.
그 말을 사실로 인정하는 건 자신이 루쿠스의 님페이아 꽃에서 주운 아이라는 것도 인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파르티케의 유언은 정말 한 점의 거짓도 없는 진실일까? 시스는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미세르 공주는 새벽의 여신 아우로라부터의 신탁이 있었노라고 했답니다. 아기를 즉 부모에게서 나지 않은 사람을 돌보고 지키고 선으로 인도하라는 여신의 음성을 들었다고 말입니다.”
콤메르의 말투에서는 판단은 드러나지 않았다. 다만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비밀과 신비에 취한 듯 조금 들떠 보이기는 했다.
“신탁……?”
시스는 낮게 되물으며 콤메르의 낯빛을 살폈다. 미세르 공주가 신탁을 받았다는 것을 그가 믿는지 어떤지 궁금했다. 콤메르는 자신도 모르겠다는 눈빛이었다.
강렬한 경험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음을 시스는 깨달았다. 말리티아를 알기 이전의 그녀였다면, 흑주술이라는 걸 직접 당해 보기 전이었다면, 번개 반도를 실제로 밟아 보기 전의 그녀였다면 ‘신탁’이라는 미세르 공주의 주장을 가볍게 웃어 넘겼을 것이다. 그러나.
쉽게 무시해 버릴 수 없었다. 시스는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미세르 공주에게 호감과 지지를 느꼈다. 잠시 그녀의 품에서 보호받았다지만 그때는 너무 어린 아기였기에 아무런 기억이 남아 있지 않으면서도 그러했다.
“나이아시스라는 이름도 미세르 공주가 지어준 것인가요?”
“여신께서 일러 주신 이름이라고 했답니다. 본디부터 그 이름이었다고.”
본디부터라니, 그 이름으로 다른 삶이 있기라도 했다는 뜻일까? 자신에 대해 알면 알수록 늘어나는 궁금증을 어디에다 물어야 할지 시스는 막막했다.
“공주와 파르티케는 아기를 데리고 카푸에 있는 왕성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아바루스 왕의 호된 추궁을 받았답니다. 아바루스는 그 사생아의 아비를 대라고 길길이 뛰었다지요. 당연히 미세르 공주는 루쿠스와 님페이아꽃과 신탁에 대해 설명했다고 하고요.”
아바루스 왕이 믿었을 리 없지. 시스의 마음속에서 쓰라린 슬픔이 샘솟았다.
“아바루스는 애초에 미세르 공주를 믿어줄 마음이 없었을 겁니다. 아바루스는 공주에게 명했답니다. 라크리모 왕가의 수치가 된 이상 어떤 권리도 누릴 자격이 없다고요. 공주는 대답했다지요. 아이와 파르티케를 데리고 조용히 사라지게 해 달라고. 물론 아바루스는 거절했지요.”
아바루스 왕이 왜 거절했는지 시스는 추정할 수 있었다. 미세르 공주가 사라진다는 건 왕가의 재산 관리권을 내놓겠다는 뜻이지만 아바루스는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았던 것이다. 사라진 자는 돌아올 수도 있으니까. 오직 죽은 자만이 다시 돌아오지 못하니까.
“예, 그렇습니다. 아바루스는 완전한 정리를 원했던 겁니다. 그러니까 미세르 공주의 죽음 말입니다.”
시스의 표정을 본 콤메르가 씁쓸하게 공감했다.
“아바루스는 공주를 협박했습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고. 말을 듣지 않으면 아기와 파르티케를 죽이겠다고 말입니다. 미워하는 누군가를 처리할 때 아바루스가 즐겨 쓰는 수법이지요. 몹시 비열하지만 또 매번 무척 효과적이었고요.”
이런 식으로 죽임 당한 또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을 콤메르는 알고 있었다. 시데레온의 대공이었던 아세르. 그는 아바루스의 요구대로 스스로 죽어 아내인 프리틸라를 살렸다.
“아바루스 왕은 자신의 비열함을 영리함인 줄 알죠.”
앙켑세라와 텔룸의 명망가들이 모임이나 파티에서 아바루스의 비겁하고 비루한 천성을 웃음거리 삼는 걸 시스도 심심찮게 주워들은 바 있었다.
“미세르 공주는 아바루스 앞에 나아가기 전에 이미 자신의 올케 언니이자 아바루스의 어머니인 이그노스 대비에게 전갈을 넣어 두었습니다. 하여 아바루스가 죽음을 종용하던 중에 이그노스 대비가 들이닥쳤답니다. 돌아가신 파시오 왕이 내린, 미세르 공주에 대한 사면권이 새겨진 검을 들고요.”
이그노스는 설령 아기가 미세르 공주가 낳은 사생아라고 하더라도 공주는 사면되어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검에 똑똑히 새겨져 있는, 반역죄가 아닌 모든 죄를 사면한다는 명을 가리키면서. 그러나 이미 욕심과 목적에 눈이 뒤집힌 아바루스는 물러서지 않았다.
“아바루스가 감히 완력을 써서 제 어머니의 손에서 검을 빼앗아 버렸다고 합니다. 그 작태를 본 미세르 공주는 이그노스 대비에게 아기를 부탁한다는 말을 남기고 단검으로 목을……. 그러자 이그노스 대비는 아바루스에게 아기와 파르티케를 살려준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이 모든 일을 귀족들과 최초 신전에 알리고 자신도 목숨을 버리겠다고 맞섰답니다.”
“그렇게 되면 당장은 권력으로 누르고 지나가더라도 언제든 틈을 보이게 되면 아바루스를 싫어하는 귀족들이나 사제들이 들고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이니까요.”
“미세르 공주가 죽음으로써 마침내 라크리모 왕가의 막대한 재산을 멋대로 주무를 수 있게 된 아바루스로서는 괜한 분란거리를 만들고 싶지가 않았을 겁니다. 이그노스 대비에게 아기와 파르티케를 데려가라고 했답니다.”
이후 파르티케가 어떤 식으로 누명을 쓰고 쫓기게 되었는지도 시스는 어렴풋이 짐작이 갔다.
“이그노스 대비를 따라간 파르티케에게 아바루스는 자객을 보냈을 테죠. 아기는 아무것도 모르니 살려 둬도 무방하겠지만 미세르 공주의 죽음으로 파르티케는 아바루스에게 원한을 가졌을 테니까요. 어쩌면 파르티케와 이그노스 대비는 아바루스가 그런 짓을 할 걸 미리 예상하고 있었을 테고요.”
콤메르가 끄덕였다.
“이그노스 대비가 선수를 쳐서 파르티케를 도망시켰다더군요.”
“파르티케를 사회적으로 매장시키기 위해서 아바루스 왕은 그녀에게 주인을 죽인 시녀라는 누명을 씌워 버린 거군요. 그랬군요. 그리고 추후에 나는 이그노스 대비와 최초 신전의 클라비스 대사제의 알선으로 포르미두사의 쿠라토 공작 부처에게 맡겨졌던 거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