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가 길어지지만, 먼저 미세르 공주를 둘러싼 라크리모 왕가의 사정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끼어들어서 미안하지만, 또 성급하다 여길 수도 있겠지만 나도 한 가지 짚고 넘어가고 싶은데요?”
시스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안다는 듯 콤메르가 기묘한 미소를 지었다. 울상과 웃음이 뒤섞인 미소를.
“미세르 공주가 레이디의 생모냐고요?”
석연치 않은 심경으로 시스가 미세하게 끄덕였다.
“라크리모 왕가에서는 그렇게 믿고 있지만 파르디케로부터 전후 상황을 자세히 들은 저로서는 글쎄요……. 끝까지 듣고 직접 판단하십시오.”
이건 또 무슨 소리지? 시스는 맥이 풀렸다. 해답을 찾은 줄 알았는데 또 수수께끼에 직면하다니. 콤메르는 잠시 침묵한 채 기다리다 시스가 다시 힘 있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자 하던 말을 이어갔다.
“아바루스의 부왕 파시오는 자신의 배다른 막내 누이 미세르 공주에게 라크리모 왕가의 재산 관리권을 맡긴다는 유지를 남겼답니다. 공주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아무도 그 권한을 침범할 수 없다고 문서로 못박았다지요.”
미세르 공주는 파시오의 부왕 세둘루스가 두 번째 왕비에게서 늘그막에 본 딸로서 아바루스보다 고작 몇 살 위였으나 그래도 엄연히 웃어른인 고모였고 매우 총명하고 청렴했다. 파시오는 믿었다. 미세르가 있는 한 아바루스가 왕가의 재산을 탈탈 털어먹는 일은 없을 거라고.
“현명한 처사였네요. 아바루스 왕의 사치와 낭비벽을 보면.”
“결과적으로는 허사로 돌아간 현명함이지요. 미세르 공주는 그리 오래 살지 못했잖습니까.”
“여러모로 안타까운 일이군요.”
“아까 그 풍문 말입니다. 주인을 죽이고 달아난 악독한 시녀. 당사자인 파르티케의 말에 따르면 그 풍문의 발원지가 아바루스 왕일 거라고 합니다. 미세르 공주의 죽음을 둘러싼 진실을 은폐하기 위한 방편일 거랍니다.”
시스는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세르 공주의 죽음으로 가장 크게 이득을 본 사람이 바로 아바루스 왕이었다. 왕가의 재산 관리권을 가져갔으니까. 그러니 어쩌면 공주를 죽인 건 아바루스가 아닐까?
“파시오가 죽고 아바루스가 왕위에 오른 몇 해 뒤에 미세르 공주는 님파 라쿠스를 보기 위해 솜다리 언덕을 방문했습니다. 거기에서 예기치 못한 사건이 생겼고 그 사건이 공주의 운명을 바꿔 놓았습니다.”
시스의 눈이 커졌다.
미세르 공주가 요정의 호수를 보러 갔었다고? 솜다리 언덕에서는 묵을 곳이 솜다리 여관밖에 없으니 당연히 거기 묵었을 테지. 시차가 꽤 나겠지만 우린 같은 풍경을 봤구나. 얼어붙은 루쿠스를, 마치 거대한 아이스 플라워 같던 그 섬을.
솜다리 여관에서의 기억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전설의 불새인 페로를 얻은 불가사의한 장면과 호수가 일으키던 시린 눈바람의 내음과 그 속에 서 있던 쓸쓸한 소년의 등이 시스의 눈앞에 생생히 되살아나 아른거렸다.
“대체 어떤 사건이기에 공주의 운명을 죽음으로까지 떠밀어 넣은 건가요? 파시오 왕이 미세르 공주를 그토록 단단히 믿고 왕가 재산 관리권을 맡겼다면 당연히 어지간한 잘못으로는 그녀를 치죄할 수 없도록 면책권도 주었을 텐데요.”
“파르티케에게 듣기로는 그냥 면책권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반역에 상응하는 죄가 아니고서는 모든 죄를 사면한다는 파시오의 명을 새긴 세 개의 검을 내렸다고 합니다. 하나는 미세르 공주에게, 하나는 아바루스에게, 하나는 파시오의 왕비이자 아바루스의 어머니인 지금의 이그노스 대비에게.”
실로 엄청난 특권이었다. 아바루스 왕의 입장에서는 미세르 공주의 존재 자체가 달가울 리 없었다. 실제로는 달갑지 않은 정도가 아니었으리라. 짜증나는 걸림돌이었으리라. 그리고 점점 눈엣가시가 되어갔으리라.
“딱 이 콤메르가 좋아할 종류의 비밀스럽고 신비한 사건이었습니다. 미세르 공주는 솜다리 여관에서 실종되었습니다. 늘 공주의 곁을 지켰던 파르티케의 말에 따르면 공주는 당시 밤의 호숫가를 거닐다 급작스런 강풍에 휘말려 그만 님파 라쿠스에 빠지고 말았다고 합니다.”
시스는 숨을 죽이고 귀를 쫑긋 세웠다.
미세르 공주는 호수에 빠져서 죽은 것이 아닐 터였다. 그렇게 되면 지금까지 들은 바와 앞뒤가 맞지 않는다. 공주는 사람의 발길을 거부하는 신성한 호수 님파 라쿠스로부터 살아 돌아왔을 것이다. 그런 다음 모종의 이유로 죽임을 당했고, 파르티케가 누명을 썼을 것이다.
“공주가 호수에 빠지는 걸 본 사람은 파르티케를 비롯해 여럿이었다고 합니다. 문제는 공주가 일 년이 지난 시점에 다시 돌아왔다는 것이지요. 쉬이 믿기지 않지만 달빛이 부서지는 호수 위를 걸어오는 공주를 파르티케는 똑똑히 봤다고 했습니다. 파르티케는 솜다리 여관을 떠나지 않고 미세르 공주를 기다렸답니다.”
“호수 위를…… 물 위를, 걸어서요?”
시스도 믿기 힘든 얘기였다.
“예, 그것도 갓난아기를 안고서요.”
콤메르가 정중한 손짓으로 시스 쪽을 가리켰다.
“그 아기가 나라고요?”
“파르티케의 말에 의하면 분명히 그렇습니다.”
난감한 기색을 띤 시스가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그 갓난아이가 즉 자신이 미세르 공주의 죽음과 연루되어 있다는 불길하고도 명확한 직감에 오돌토돌 소름이 돋았다.
“놀라시기에는 아직 이릅니다. 믿기지 않는 이야기가 계속 이어지니까요. 미세르 공주는 자신이 루쿠스에 다녀왔다고 주장했답니다. 호수의 물살에 실려 루쿠스에 닿았다고, 얼음으로 덮인 물가에서 얼음 위에 피어난 새하얗고 커다란 님페이아꽃을 발견했다고, 그 겹겹의 꽃잎 속에 그 아기가 있었다고 말입니다.”
시스는 미심쩍다는 듯 머리를 갸웃댔다. 혹시 미세르 공주가 꾸며낸 이야기가 아닐까? 일 년이라는 시간은 아이를 낳기에 충분한 시간이니까.
“이 콤메르도 파르티케 앞에서 꼭 그런 표정을 지었었습니다. 한데 파르티케가 펄쩍 뛰더군요. 죽어가던 사람이 어떻게 그런 기운이 솟았는지 제 팔을 꽉 잡고 무서운 눈으로 쏘아보는데 팔이 끊어질 것 같더라니까요. 파르티케가 힘주어 말했습니다. 공주는 자신이 솜다리 여관을 단 하루 떠나 있은 줄 알더라고. 맹세코 일 년이 아니라 단 하루였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