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 꺼림칙한 기분

by 화진


시스는 두어 번쯤밖에 본 적 없는 이그노스 대비를 떠올렸다. 대화를 나누지는 못했고 그저 얼마간의 거리를 두고 바라본 것이 전부였지만 차분하고 너그러워 보이던 기억이었다. 짧게 시선이 마주쳤을 때 그녀의 눈에서 일렁이던 감정이 무엇이었는지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았다.


착잡했겠지. 미세르코르디아 공주를 떠올렸겠지. 나에게서 찾아보고 싶기도 했겠지. 미세르 공주가 목숨을 내어주고 지킨 것이 과연 무엇인지. 어쩌면 실망스러웠겠지. 그런 가치가 보이지 않아서. 내가 평범하다 못해 하숙집 주인인 앙켑세라의 시녀나 다름없이 보였을 테니까.


“파르티케는 시골 친척집으로 가 신분을 숨긴 채 십 년 남짓 죽은 듯이 숨어 지냈다고 합니다. 그러다 병이 든 것을 알게 됐고 죽기 전에 그 아기에게 모든 것을 알려줘야 한다는 의무감이 들었다지요. 돌아가신 미세르 공주를 위해 자신이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이라고요.”


십 년 남짓이라면. 시스는 그 시절을 되짚어 보았다. 내가 열 살쯤이었을 때야. 그럼 이미 포르미두사의 공작 가에서 쫓겨나다시피 하여 텔룸의 하숙집에서 지내고 있을 때였어.


“그녀는 헛걸음을 했겠군요.”


“그렇습니다. 하여 다시 아기를 찾아 텔룸으로 가던 길이었는데 공교롭게도 여기 남생이 여관에 이르러서 더는 여행을 하기 힘들 만큼 지치고 쇠약해진 것이지요.”


콤메르는 진의를 알기 힘든 쓴웃음을 지었다. 얼핏 연민으로도 보이지만 다르게 보자고 들면 다행스럽다는 기색 같기도 했다. 연민과 다행, 둘 다 그의 솔직한 감회일 터였다. 비밀을 좋아하는 정보상이 공짜로 엄청난 비밀을 얻게 되었으니.


“그런데, 콤메르 님.”


시스가 뭔가를 물어보려는 듯 불렀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왜 진작 자신을 찾아와 이 모든 사실을 말해주지 않았느냐고 물으려던 시스는 마음을 바꿔 슬쩍 얼버무리고 말았다. 이미 이렇게 된 일인데 그걸 따져 본들 무슨 소용이라고. 콤메르의 대답이 예상되기도 했다. 아마도 십중팔구.


‘제가 왜요? 이 콤메르에게는 그럴 의무가 없습니다. 파르티케의 유언은 어디까지나 제가 그 유언을 발설할 수 있는 상대가 오직 레이디 나이아시스라는 것이지, 굳이 찾아가서 떠들라는 말은 없었으니까요.’


이런 식으로 눙치고 넘어갈 테지. 시스도 쓴웃음을 머금었다. 지금까지는 그녀 자신조차 출생을 둘러싼 자세한 사정을 알려고 들지 않았으니. 그 비밀을 혼자 간직한 채 시치미를 떼고 있었던 콤메르를 나무랄 계제는 아니다 싶었다.


“자, 레이디 나이아시스.”


“시스라고 불러요.”


“좋아요. 레이디 시스. 이 콤메르는 궁금하군요. 파르티케의 유언을 다 듣고 난 지금,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말입니다. 자신이 어디에서 온 것 같은가요? 루쿠스의 님페이아꽃으로부터? 아니면 미세르 공주로부터?”


“미세르 공주가 내 어머니라는 생각은 들지 않아요. 그분이 나를 살린 은인인 건 확실하지만요. 하지만 솔직히, 온통 얼음으로 뒤덮인 섬 루쿠스에 님페이아꽃이 피어 있었다는 것도, 그 꽃이 아기가 들어갈 만큼 커다랬다는 것도, 미세르 공주가 거기에서 나를 거둬 님파 라쿠스의 물 위를 걸어서 솜다리 언덕으로 돌아왔다는 것도, 선뜻 믿어지지는 않네요.”


“제삼의 가능성을 생각하시는 겁니까? 이를테면 아기를 낳은 것이 알려져서는 안 되는 어떤 인물이 갓 태어난 레이디 시스를 미세르 공주에게 맡겼다든가 하는?”


“그럴지도 모르죠.”


“파르티케의 유언이 진실한 것인지 어떤 것인지 이그노스 대비나 클라비스 대사제를 찾아가 확인해 보실 겁니까? 이 콤메르가 당사자라면 그렇게 할 것 같다는 말씀이지요.”


“글쎄요. 지금으로선…… 어떻게 할지 모르겠어요.”


시스는 자신의 수명이 길게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떠올렸다. 고작 일 년 가량이다. 그 아까운 시간의 일부 혹은 전부를 출생에 대한 의문을 푸는 데 할애하는 것은. 헛된 집착일까, 의미 있는 마지막 행보일까?


“변장을 하신 건 좋은 선택입니다. 실은 최근 두 군데에서 레이디 시스를 찾는 은밀한 전갈이 들어왔답니다.”


콤메르가 방 안쪽의 책상 서랍에서 접시만 한 양피지 두 장을 꺼내 왔다.


“이 초상화와 함께 말입니다.”


자신의 얼굴이 각기 다른 화풍으로 비교적 단순하게 그려진 두 양피지를 시스는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양쪽 다 그린 자의 솜씨가 시원찮네요. 나를 실제로 본 적이 없는 자가 그렸나 봐요. 내 얼굴은 이 그림보다 훨씬 나은데. 물론 쐐기풀로 변형시키지 않은 멀쩡한 얼굴을 기준으로 말이에요.”


무심결에 농담을 해놓고는 시스가 멋쩍게 웃었다. 그러고는 이내 정색하고 덧붙여 물었다.


“두 군데라니. 어디와 어디죠?”


“카푸와 타키툼입니다.”


“타키툼은 프레케스 공작 가일 텐데, 카푸 쪽은 누구죠?”


“그게 좀 마음에 걸립니다. 이름 없는 헌신자들, 이라고 들어보셨습니까?”


시스는 생경한 명칭을 입속으로 중얼거리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이름 없는 헌신자들이라니. 왠지 모르게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다.


“모르시는 게 당연합니다. 별로 알려져 있지 않은 자들이라서요. 카푸가 근거지인데 정확히 무얼 하는 무리인지, 우두머리가 누구인지, 아직 이 콤메르도 모를 정도니까요.”


자존심이 상한다는 듯 콤메르는 인상을 긁었다.


“그걸 알려주는 건 내 안전을 사라는 뜻이로군요?”


콤메르는 이러니저러니 해도 본질이 장사꾼인 것이다. 시스는 그 점을 한 순간도 잊지 않고 있었다.


“뭐 이 콤메르가 무도한 인간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자선사업가도 아니니까요. 하하핫.”


경쾌한 웃음소리가 창틀에 뿌려 놓은 빵 부스러기들을 쪼아 먹던 작은 새들을 놀라게 했다. 산새들은 일제히 푸르르 날아올랐다가 다시 조심스레 먹이를 향해 다가왔다.


“나를 못 본 것으로 해주면 그들이 제시한 액수의 일 점 오배를 내겠어요.”


그 정도는 기꺼이 낼 수 있었다. 말리티아에게 끔찍하게 당해 본 시스로서는 상상만으로도 치가 떨렸다. 어디론가 끌려가는 것도, 자유로운 일상을 빼앗기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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