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산이라는 걸 할 줄 아시는 레이디로군요.”
콤메르의 큰 눈이 기쁜 듯 반짝였다.
“말이 잘 통하는군요. 그리고 한 가지가 더 필요한데요.”
“아니오, 아니오. 잠깐만요, 레이디 시스. 이 콤메르는 일 점 오 배를 수락한다는 말씀을 드리지 않았습니다. 흥정을 좀 할 참이었거든요.”
그가 제안을 받아들였다고 생각했던 시스는 굳어진 얼굴로 짧은 헛숨을 뱉었다.
“질질 끌 것 없이 원하는 액수를 말해 봐요. 저쪽의 두 배? 세 배?”
무미건조해진 시스의 말투에서 콤메르는 자신이 오해받고 있음을 깨달았다. 말하자면 곤경에 빠진 사람을 몰아붙여 금고나 채우는 얄팍한 인간으로. 곧 풀릴 오해였으므로 콤메르는 은근히 즐기고 있었다.
“저어 그런 게 아니라요, 레이디. 저들이 금화를 걸었으니 레이디께도 금화로 받는 것이 마땅하기는 한데……. 꼭 그래야만 하는 건 아니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이 콤메르가 금화가 아닌 다른 것으로 지불받기를 원한다면 말씀입니다.”
“다른 것? 그 말은 혹시…… 정보를 원한다는 뜻인가요? 나에게 그런 쓸 만한 정보가 있을까요?”
난 이미 나의 신상을 팔았는데?
숲의 반영을 담은 투명한 물 같은 눈으로 시스가 콤메르를 직시했다. 콤메르는 쑥스러워하며 머뭇거리다 겨우 입을 열었다.
“예, 옳게 보셨습니다. 이 콤메르가 가치 있게 여길 만한 무언가가 분명 있을 겁니다. 잘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시스는 그가 원하는 대답이 따로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까도 말했다시피 이런 일로 시간을 허비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요. 그러니 에두를 것 없이 곧바로 말해 봐요. 나에게서 뭘 알고 싶은 거죠?”
“좀 민감한 사안일 수도 있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이 콤메르를 무례하다 여기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괜한 염려 말고, 묻고 싶은 게 뭔지 어서 물어 봐요.”
콤메르의 호기심이 어디를 가리키는지 시스는 감이 왔다. 내 결혼에 문제가 있다는 걸 저 사람은 알고 있는 거야. 그런데, 어떤 경로를 통해서 어디까지를 알고 있기에 나에게 더 물을 것이 있다는 걸까.
“레이디 시스와 프레케스 공작의 결혼에는 무슨 하자가 있었던 겁니까?”
가짜 신랑에 대해 알고 있으면서 콤메르는 두루뭉술하게만 알고 있는 듯이 가장했다. 시스는 헷갈렸다. 콕 집어 결혼의 하자라는 표현을 쓴 것을 보면 뭔가를 알고 묻는 것도 같고, 굳이 확인하려 드는 걸 상세한 내용은 모르는 것도 같고.
“신전에서 나와 나란히 여신의 발아래에 섰던 자가 알고 보니 프레케스 공작이 아닌 엉뚱한 자였죠.”
시스는 시원스럽게 털어놓았다. 만에 하나 이 사실이 소문이 되어 퍼져 나간다 해도 자신에게는 불리할 것이 없다는 판단이었다.
차라리 아바루스 왕이 가짜 신랑 건을 알게 된다면 결혼을 무효화하는 것이 의외로 수월할지도 몰랐다. 아바루스에게도 이득이면 이득이지 손해는 아닐 터였다. 시스와 데세르 프레케스의 결혼이 무효가 되면 시스를 새로 또 누군가의 신부로 비싸게 팔아먹을 수 있을 테니까.
“프레케스 공작 측에서 내세운 가짜입니까?”
“예, 알고 보니 그렇더군요. 그러면 이것으로 난 정당한 대가를 주고 내 안위를 매입한 겁니다. 그렇죠, 콤메르 님?”
“물론입니다. 이 콤메르 목에 칼이 들어와도 레이디 시스께서는 남생이 여관에 오신 적이 없는 것입니다.”
두 손을 가슴께에 모아 쥔 채 콤메르가 확답했다.
“그런데 이 콤메르에게 질문이 아직 하나 남았습니다만. 레이디께서도 아까 필요한 게 한 가지 더 있다고 하셨잖습니까? 어떻게, 거래를 하시겠습니까?”
콤메르는 마치 가장 좋아하는 음식을 앞에 두고 입맛을 다시는 아이 같았다. 설레어 보이기도 하고 조바심이 나 보이기도 했다. 시스는 내심 혀를 내둘렀다. 호기심과 궁금증의 충족이 삶 그 자체인 사람이 정말 존재하는구나.
“일단 들어 보고 결정하겠어요.”
시스의 유보적인 태도가 콤메르에게는 비관적인 징조로 느껴졌다. 그러나 콤메르는 물러설 수 없었다.
“그…… 가짜 신랑 말씀입니다. 그는 누구였습니까? 어떤 인물이었습니까?”
시스는 순간적으로 쿡 하고 웃음을 지었다. 왜 그런 반응이 비어져 나왔는지는 스스로도 알 수 없었지만 보송보송한 깃털 같은 웃음이었다.
“이런, 어쩌죠? 그자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전혀 없답니다. 신전에서 본 게 다였으니까요.”
그때의 라무스는 가짜 신랑 노릇으로 인생을 꼬아 놓은 사기꾼이었으나 지금의 라무스는 생명의 은인이었다. 이제까지 시스가 살아온 방식을 볼 때 그녀가 마냥 이타적이고 정의롭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은인을 팔아넘길 만큼 의리를 모르는 인간도 아니었다.
“정말입니까?”
콤메르는 실망감과 좌절감을 감추지 못한 채 거의 울상을 하고 있었다.
“정말이고말고요. 내가 그 사기꾼에 대해 아는 게 있었다면 진즉에 온 세상에 대고 외치고 다녔을 걸요? 혹시 그 사기꾼이 누구인지 알게 되면 나에게 연락 줘요. 그 정보는 내 거예요. 언제가 됐든 내가 살게요. 내 인생을 꼬아 놓은 사기꾼놈을 가만 둘 수가 없거든요.”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치기까지 하면서 시스가 씩씩거렸다. 이런 정도의 연기에는 이골이 나 있는 시스였다. 레이디 앙켑세라의 동업자로 일하면서 온갖 잔기술과 그럴듯한 연극을 구사해온 덕분이었다.
“알겠습니다. 원칙적으로 예약은 받지 않지만, 예외로 해드리겠습니다.”
“난 텔룸으로 안전하고 빠르게 돌아가야만 해요. 그러자면 아무도 함부로 멈춰 세우거나 건드리지 못할 마차가 필요하죠. 그러니 콤메르 님의 마차와 마부를 빌려줘요. 값은 후하게 치르겠어요.”
“금화로 말씀입니까? 금화로 치르시면 꽤 비쌀 텐데요. 이 콤메르의 심복 아미쿠스를 마부로 딸려 보내는 건 지금껏 누구에게도 베푼 적이 없었던 크나큰 친절이랍니다.”
콤메르가 시큰둥하게 말했다.
어떤 이들은 아미쿠스가 아미쿠스인 동시에 콤메르인 것으로 알고 있기도 했다. 또한 콤메르는 대륙의 요지마다 여관을 두고 있는 여관왕이었고 녹스 용병단의 비호를 받는 인물이었다. 콤메르의 마차는 실로 안전한 이동 수단이었다.
“실은, 금화 따위와는 비할 수도 없는 좋은 것이 나에게 있답니다. 분명 까다로운 콤메르 님의 마음에도 들 거예요.”
시스가 여유만만하게 눈웃음을 띠었다. 쐐기풀의 독으로 울퉁불퉁 부어오른 얼굴임에도 눈웃음은 제법 매력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