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도를 따라 늘어선 포플러나무는 초여름 햇빛 속에 푸르게 반짝였다. 산들바람이 가지들을 간지럽히고 갈 때마다 귀염성 있는 둥근 잎들이 저마다 자지러졌다. 그럴 때마다 차르륵차르륵 편안하고 경쾌한 음향이 흩날렸다.
그 소리에서 번개 반도의 깨끗한 모래톱을 쓸고 가던 파도 소리가 연상되었다. 마차 창의 커튼을 열고 귀를 기울이던 시스의 얼굴에 어떤 그리움이 스쳐갔다. 오래 머물지 않았는데도, 단 한 번밖에 가지 못했는데도 영원한 향수로 남는 곳이 있다.
그만큼 아름다웠던, 평화로웠던, 애잔했던, 고마웠던, 미안했던 번개 반도와 도채비족. 시스는 눈을 감고 오래 기억하고픈 풍경을 되살려 보았다. 다시 볼 수는 없겠지. 한없이 선한 존재들도, 정결한 숲과 바다도.
시스는 까무룩 잠에 빠졌다. 그리고 물에서 노는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시스는 깊은 물속을 자유자재로 유영했고 호흡에 얽매이지 않았다. 그리고 혼자가 아니었다. 가까이에서 애정을 듬뿍 담은 맑은 웃음소리가 들려왔고, 수면 위에 새하얀 그림자를 드리운 채 지켜봐 주는 다정한 눈도 있었다.
여기는 어딜까? 저들은 누구일까? 이런 꿈은 처음이었다. 몹시 생경한데 묘하게 편안했다. 깨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들 만큼.
맞다, 꿈마녀. 말리티아는 아주 멀리 있을 테니 꿈마녀를 불러서 물어 봐야겠어.
‘백작 부인, 백작 부인. 좀 나와 봐.’
아무리 불러 봐도 꿈마녀는 대답이 없었다. 대신 다른 누군가가 말을 걸어 왔다. 물방울이 튀는 듯 청아한 목소리로.
‘제발 다시 생각해보면 안 될까? 내 소중하고 어리석은 자매야.’
시스는 어리둥절했다. 나는 당신의 자매가 아니라고 말하려다 꿈에선 무슨 일이든 가능하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자매라는 여자가 궁금해 시스는 고개를 돌려 보려 했다. 그러나 몸은 그런 의도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시스는 기쁜 듯 소리 높여 웃으며 물속을 가르고 나아갔다.
‘난 어리석지 않아. 난 무척 행복해.’
녹색으로 무리 지은 침수 식물 사이를 미끄러지듯 누비며 시스는 소리쳤다. 청량하고 비린 물풀 냄새가 왠지 모르게 익숙하고 좋았다. 그때 갑자기 현실에서 날아온 말의 그물이 시스를 꿈으로부터 끄집어냈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합니까, 레이디? 마차가 텔룸으로 들어섰는데요.”
마부석에서 아미쿠스가 묻고 있었다.
“앞으로 쭉 가다 보면 세 갈래 길이 나와요. 거기서 제일 오른쪽 길이에요. 그 길을 따라 계속 가다 보면 커다란 저택들이 드문드문 나올 거예요. 눈 표범 석상이 있는 저택이 나오면 마차를 멈춰요.”
여름의 녹음이 막 시작된 텔룸은 활기가 넘쳤다. 거리에는 나무와 화초 들이 향기로운 그늘을 드리웠다. 시장은 맛있는 냄새와 흥정하는 소리로 떠들썩하고, 사람들은 쾌활했다. 텔룸은 지식과 교류의 도시, 풍요와 평화의 도시였다.
시스가 커튼으로 얼굴을 가린 채 고향이나 다름없는 거리의 풍경을 감상하는 동안 마차는 부드럽게 달렸다. 텔룸 시가지의 가도는 정비가 잘 되어 있어 마차 바퀴가 매끄럽게 굴렀다. 한참 만에 마차는 웅장한 저택 앞에 멈춰 섰다.
“다 왔습니다. 눈 표범 석상이 멋지네요.”
아미쿠스가 마차 문을 열고 시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시스는 쐐기풀의 독이 오른 얼굴을 모자와 얇은 스카프로 가린 채 마차에서 내렸다.
눈 표범 석상은 정문의 왼쪽에서 금방이라도 뛰어 올라 덮칠 듯한 태세를 취하고 있었다. 시스는 석상의 머리를 쓰다듬고 나서 정문에 달린 줄을 잡아당겼다. 거기에는 리듬감과 규칙이 있었다. 줄은 저택 안으로 이어져 있고 그 끝에는 종이 매달려 있다.
이윽고 넓은 정원 건너의 현관문이 열리고 한 사람이 나는 듯이 뛰어 왔다.
“시스! 무슨 일이야? 어떻게 된 거야? 괜찮은 거야?”
젊은 귀족 청년은 시스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경악하여 정문을 열었다. 그의 뒤에서 시종장인 듯 보이는 노인이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종종걸음을 쳐 쫓아오고 있었다.
“아, 괜찮아, 괜찮아. 사정이 좀 있었어.”
울긋불긋 울퉁불퉁 부풀어 오른 얼굴로 시스는 활짝 웃었다.
두 사람의 친근한 모습에 아미쿠스는 마음을 놓았다. 자신의 임무를 무사히 다한 것이다.
“그럼 전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아미쿠스가 시스에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들어와서 요기도 하고 좀 쉬었다 가지 그러오?”
청년이 말하고는 시종장에게 그를 잡으라는 눈짓을 했다. 푸근한 인상의 늙은 시종장이 나서기 전에 아미쿠스는 사양의 뜻을 표했다.
“아이구, 아닙니다, 아닙니다. 우리 주인 어르신께서 기다리고 계시는지라 바삐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답니다.”
“고마워요. 어르신께도 내 고마움을 전해 줘요.”
시스가 아미쿠스에게 인사하자 청년과 시종장도 더는 참견하지 않았다. 아미쿠스는 냉큼 마차에 올라 길을 재촉했다.
“아디코. 쿠라에게 시스의 식사와 목욕물을 준비해 달라고 해.”
청년이 말하자 시종장 아디코가 시스에게 환영의 미소를 던지고는 저택을 향해 다시 종종걸음을 놓았다.
“고마워, 인티무스. 그런데, 프로핀은?”
“프로핀은 카푸에 놀러 가고 없어.”
시스에게 팔을 내밀면서 인티무스가 웃었다. 그의 여동생 프로핀은 시스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다행이다. 언제 오는데?”
시스는 인티무스의 팔을 잡고 걸었다.
“잘 모르겠지만 최소한으로 잡아도 열흘 안에는 안 돌아올 거야. 어제 떠났거든. 방학은 아직 많이 남았고. 그런데 정말 무슨 일이야?”
인티무스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시스를 돌아보았다.
“다 설명할 수는 없어. 미안해. 아, 그리고 레이디 앙켑세라에게 이리 와 달라고 편지 써도 될까? 지금 내가 남들 눈에 띄면 안 되는 처지거든.”
시스는 자신을 찾고 있다는 사람들의 감시망을 피하기 위해 앙켑세라의 집으로 가지 않고 판테라 가의 별저로 온 것이었다. 인티무스 판테라의 어머니가 텔룸 시장의 누이였다. 그러니 이 저택은 텔룸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나 마찬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