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었지.”
“예? 그, 늙는 거야 누구나…….”
말하던 도중에 라무스는 깨달았다. 살아 있는 인간이라면 늙는다는 건 아무도 거스르지 못하는 순리가 맞다. 그러나 방금 파보르가 말한 ‘늙음’은 그런 자연스러운 현상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혹시 잠깐 사이에 그렇게 되셨다는 뜻입니까?”
라무스의 시선이 다시 기묘한 그림으로 향했다. 그림이 조금 전과 전혀 다르게 보였다. 수많은 실이 감긴 듯 보였던 것이 주름살들의 압축으로 보였다. 고치처럼 보였던 형상은 쪼그라든 얼굴로 보였고.
“두 분이 마침내 번개 반도에 발을 들였다는 대목에서부터 아버지의 얼굴이 변하기 시작했단다. 처음에는 서서히, 그리고 점점 더 빠르게. 주름이 지고 머리카락과 눈썹이 하얗게 세고, 음성도 걸걸하게 가라앉고 키와 몸피도 줄어들더구나. 이야기가 끝날 무렵에는 마치 몇백 년은 늙은 듯이 더 이상 늙을 수 없을 만큼 늙어 버리셨지. 더 이상 늙을 수 없을 만큼.”
파보르는 마지막 말을 반복함으로써 ‘죽음’을 암시했다. 죽은 사람은 더 이상 늙지도 고통 받지도 않는 법이니까.
“아버지께서는 번개 반도에 갔던 일을 글로 써서 남겨 보려고 몇 번이나 시도하셨지만 번번이 실패하셨다는구나. 펜을 잡는 즉시 쓰려던 내용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더란다. 나도 기록으로 남기려고 시도해 봤는데 아버지 말씀대로였다.”
둘 사이에 내려앉아 있던 침묵을 파보르가 깨뜨렸다.
“내 얘기는 여기까지다. 지금부터는 네 얘기를 좀 들어 보고 싶구나. 솔직히 나는 지난번에 네가 안식년을 받았다고 인사를 하러 왔을 때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네가 영영 녹스 성채를, 나를 떠나는 것만 같았지. 그래도 그때는 혹시 모른다는 생각을 위안 삼을 수 있었는데, 이제는 정말 마음으로부터 너를 놓아줘야겠구나. 네가 누구인지 알았으니. 안식년을 청할 때부터 너는 시데레온으로 돌아가려던 거야. 맞지?”
아내 숩틸리와의 사이에 자식을 두지 못한 파보르는 내심 라무스를 차기 단주로 점찍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마음을 깨끗이 접을 수밖에 없다. 라무스가 시데레온 대공의 지위를 계승해야 할 몸이기 때문이었다.
녹스 용병단에는 철칙이 있었다. 어디까지나 독자적인 용병단으로 남아야 한다는. 어느 나라에도 어떤 귀족에게도 귀속되어서는 안 된다는.
“그렇습니다. 아세르 유바론의 아들로서 저는 아바루스 라크리모에게 받아내야 할 빚이 있으니까요.”
목숨 빚이다. 라무스는 아버지의 복수를 하고 어머니가 뒤집어쓰고 있는 피리 도둑의 누명을 벗겨 결백을 밝혀야 했다.
그러나 그 전에 시데레온 사람들의 생각을 알고 싶었다. 그들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만약 그들이 현재의 삶을 지키고 싶어 한다면 라무스는 그들에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들이 원치 않는다면 아바루스 왕에게 빚을 받아내는 건 라무스 개인의 일이었다.
“아바루스는 대륙 전체의 왕으로 군림하고 싶어 하지. 이미 반쯤은 이룬 거나 마찬가지고.”
그만큼 라무스가 목적을 달성하기 쉽지 않으리라는, 그의 길이 험난하리라는 뜻이었다.
“아바루스가 무얼 가졌든, 얼마나 더 많이 가지든, 결국 다 잃을 겁니다. 새벽의 여신 아우로라와 밤의 여신 녹스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건대, 제가 반드시 그의 품에 영원한 칠흑의 밤을 안겨 줄 테니까요.”
“라크리모 가의 페르베아투를 비롯해서 대륙의 크고 작은 나라들은 모두 그 첫 시작이 시데레온의 유바론 가에 충성을 맹세한 소영주였다. 그런데 지금은 페르베아투가 시데레온을 위협하고 있어. 삼백 년 전 페르베아투가 감히 왕국을 선포하려 할 때 시데레온은 그걸 좌시하지 말았어야 했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때 너희 유바론 가에서 라크리모를 엄중히 꾸짖고 시데레온 왕국을 선포하여 티토니아 대륙의 주군이 누구인지 한 번 더 명확하게 주지시켰어야 한단 말이다.”
파보르가 딱하다는 듯 탄식했다. 유바론은 대대로 관대하고 강직한 가문이었다. 능력이 따라주지 않거나 나약했던 주군은 있었을지언정 탐욕스럽거나 권력 지향적인 주군은 없었다.
무고한 사람들이 한꺼번에 죽어 나가거나 다수의 사람들이 들고 일어나지 않는 이상 유바론은 소영주 가문의 통치에 간섭하는 법이 없었다.
“그랬다면 지금의 상황이 달라졌겠습니까?”
“달라졌을지도 모르지. 아닐 수도 있지만 말이다. 하여튼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지금은 세상이 달라졌다는 거야. 유바론의 관대함보다 라크리모의 위력에 사람들은 더 끌리고 있어. 그렇지 않니? 또 아바루스 왕은 사람들을 시켜 은근히 말을 퍼뜨리고 있지. 온 대륙이 하나의 강력한 왕국이 되면, 이쪽의 풍요로움과 저쪽의 결핍을 상쇄하여 전체적으로 모두가 더 살기 좋은 나라가 될 거라고.”
듣고 있던 라무스는 미간에 힘을 주었다. 아바루스의 성품이나 행적을 잘 아는 라무스나 파보르 같은 이들은 그 구호가 공허한 사탕발림에 지나지 않음을 간파하고 있었다. 그러나 멀리서 바라보는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아바루스의 구호가 먹혀들 수도 있었다.
“무슨 말씀이 하시고 싶은 겁니까?”
“알면서 확인하려 드는구나. 그래, 좋다. 나는 네가 유바론답지 않은 유바론이었으면 한다. 복수도 복수지만 라크리모 가문의 야심을 저대로 둬선 안 된다는 말이다. 아바루스 하나 제거한다고 라크리모가 무너지는 건 아니다. 아바루스보다 그의 사촌 가투스가 더 위험한 인물이란다. 시데레온에 자문관으로 가 있는 가투스 라크리모, 그는 한 번도 포효하지 않은 맹수와도 같다. 그 맹수의 송곳니와 발톱을 본 사람이 없기에 그 위험성을 모른다는 말이지.”
파보르가 가투스의 주걱턱을 시늉하면서 짐짓 차갑고 음흉한 낯빛을 지었다. 가투스를 본 적이 없는 라무스였지만 스승이 가투스의 얼굴을 해 보였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스승님의 말씀은 라크리모 가문 자체를 재기 불능의 상태로 무너뜨려야 한다는 뜻입니까?”
라무스의 말은 건조했다. 다만 그의 짙푸른 눈동자가 서늘한 불꽃처럼 타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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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게 이어지는 극심한 더위에 좀 지치는 것 같습니다. 아아, 그래도 다음 주 쯤에는 조금은 덜 더워지겠지요?
부디 다들 이 힘든 여름과 건강하게 안녕하시기를요. 우리 모두 아자아자! 입니다. :-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