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 파보르의 비밀

by 화진


색감은 바랬지만 정밀하고 아름다운 초상화였다. 라무스는 저도 모르게 초상화와 파보르를 비교하듯 번갈아 보았다.


“내가 외적인 면에서 어머니의 장점을 전혀 물려받지 못했다는 건 나도 잘 알고 있단다.”


그러니 아무 말도 말라는 듯 파보르가 한 손을 내저었다.


“눈빛은 물려받으셨는데요?”


보랏빛이 비치는 홍채였다.


“그런데 제대로는 아니잖니. 나는 이렇게 가까이에서 자세히 들여다봐야 알 수 있는 어정쩡한 보라색이고 어머니는 선명한 자수정 같은 눈동자였고.”


말은 이렇게 하면서도 파보르의 얼굴에는 어쩔 수 없이 뿌듯한 미소가 퍼졌다.


“강신 사제는 다 저에게서 그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걸까요? 그 점은 차치하고, 스승님께서 강신 사제 자체는 아니시잖습니까. 모친의 능력이 스승님께 이어졌다는 겁니까?”


티토니아에서 남자는 여신의 사제나 신관이 될 수 없다. 당연히 강신 사제로 태어나는 아기는 예외 없이 모두 여아였다. 또한 강신 사제의 능력은 다음 세대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사실도 이미 밝혀져 있었다.


“강신 사제들이 다 네 소리를 들을 수 있을지 어떨지, 그 소리를 내가 들을 수 있게 된 것이 어머니께 이어받은 건지 아닌지는 나도 모른단다. 어쨌거나 그것도 가능성 중의 하나지. 아직 너에게 들려줄 이야기가 남았고.”


액자를 서랍에 되돌려 놓고 파보르는 라무스를 향해 앉았다.


“라무스, 얘야. 언젠가 내가 너에게 내 아버지 얘기를 얼핏 한 적이 있었지?”


라무스는 파보르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아버지께서 번개 반도에 가신 적이 있다고 말했을 때 넌 진지하게 듣고 있었지. 하지만 난 눈치챘단다. 그 진지함은 속내를 잘 숨기는 너의 진짜 심경이 아니라는 걸. 넌 속으로 내 말을 의심하고 있었어. 의심하는 한편 믿고 싶어도 했지. 내가 네 스승이기 때문에. 네 속에서 스승에 대한 신뢰와 이성적인 판단이 충돌하고 있었던 게야. 내가 틀리게 본 거니?”


“맞게 보셨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예쿠르 님께서 번개 반도에 가신 적이 있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정말입니다.”


예쿠르가 바로 파보르의 아버지이자 선대 단주이다.


“호오. 그러니?”


파보르가 머리를 갸우듬히 기울였다. 약간 가늘어진 그의 두 눈은 라무스를 꿰뚫기라도 할 듯이 예리한 빛을 쏘았다.


“정말인 것 같구나. 그런데, 어떻게 네 마음이 그처럼 확실하게 바뀐 거니?”


“그 까닭에 대해서는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스승님.”


라무스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번개 반도에 다녀왔다는 말을 입에 담아서는 안 된다는 다짐을 되새기면서 문득 궁금해졌다.


예쿠르 님은 자신의 아들에게 번개 반도와 도채비족에 대해 들려주셨어. 도채비족이 걸어 놓은 금제를 깬 거야. 그에 대한 응보로 정말 돌이키지 못할 재앙을 입으셨을까? 어떤 재앙이었을까?


“그래. 내 아버지는 진짜로 번개 반도를 밟으셨어. 내 어머니와 함께. 아니, 나도 함께였다고 해야 하나?”


파보르는 따스하게 웃었다.


“오늘은 그 일에 대해 다 들려주마. 아버지께선 도채비족과의 약속을 어기고 나에게 말씀을 해주신 대가로 돌아가셨지만. 나는 약속의 당사자가 아니고 또 전에 너에게 슬쩍 얘기해 봄으로써 내가 그 일을 언급하는 데에는 제약이 없다는 걸 확인했으니.”


라무스는 파보르가 가장 아끼는 제자였다. 파보르가 번개 반도와 아버지에 대해 알려준 유일한 사람이 라무스였다. 그 일을 처음 언급하던 그때 파보르는 각오를 했었다. 자신이 아버지와 같은 재앙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그러나 다행히 그런 불행한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스승님께서도 예쿠르 님과 함께였다고요? 그렇다면 스승님께도 도채비족의 금제가 해당되어야 앞뒤가 맞지 않습니까?”


“그렇지? 그런데 나는 거기에 딱 맞아떨어지는 경우가 아니란다. 그 점이 이 이야기의 가장 재미있는 지점이자 핵심이야.”


파보르는 유쾌해 보였다. 라무스는 지금 눈앞의 스승이 마치 비밀스러운 정보를 건네기 전의 콤메르 같다고 느꼈다.


“제자야. 한 번 추론해 보겠니? 왜 내가 번개 반도에 갔었음에도 도채비족의 금제에 영향받지 않는지 말이다.”


‘왜 그런지 추론해 보겠니?’ 라무스가 파보르의 학생으로 공부하면서 수없이 들었던 소리였다. 라무스의 기억으로는 열에 일고여덟은 답을 맞혔던 것 같다. 라무스는 자신이 아는 사실들을 천천히 그리고 꼼꼼히 나열하고, 해체하고, 재조합해 보았다.


이윽고 라무스는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갈 때도 두 사람, 올 때도 두 사람이었던 겁니다. 번개 반도로 가는 길에는 스승님께서 아직 모친의 태내에 계셨겠지요. 번개 반도에서 스승님이 태어나고 모친께서는 유명을 달리하셨던 겁니다. 그래서였겠지요. 예쿠르 님을 모루스 해에 장사지내신 것도! 모친의 묘지가 없었던 것도 말입니다.”


예쿠르가 죽었을 때 파보르는 열여섯 살이었다. 예쿠르는 마침내 때가 된 것이라고 여겼다. 아들이 제몫을 하는 사내로 장성했으니 이제 모든 것을 맡겨도 되겠다고. 그리고 자신은 이만 아내의 곁으로 가도 되겠다고.


“과연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구나. 그렇게 된 것이란다. 내가 생기고 나서 어머니께서는 기침병에 걸리셨지. 그리고 임신 여섯 달째의 여섯째 날에 우리 모자의 앞날을 보셨지. 어머니께서는 한 달 뒤에 기침병의 악화로 돌아가실 운명이었던 게다. 어머니는 내 아버지께 번개 반도로 가자고 했지. 아기를 살릴 길은 그 길밖에 없다고.”


파보르의 어머니 스피리티는 자신이 강신 사제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내던지고 도망친 데 대한 벌을 받는 거라고 여겼다. 자신의 과오로 무고한 아기까지 희생되는 거라고. 뱃속 아기는 아무런 죄가 없는데도.


스피리티는 자신이 받는 벌은 인정하고 달게 받을 수 있었으나 아기에 대해서는 그럴 수 없었다. 아기에게는 자명하게 부당한 처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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