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 욕심은 눈과 귀를 가리지

by 화진


“흔히 들을 수 있는 악기로서의 피리 소리와 똑같지는 않지만. 들을 수 있고, 또 알 수 있지. 이 소리가 플라토르의 피리 소리라는 걸.”


대답은 하면서도 파보르는 뭔가 생각에 빠진 듯 게슴츠레하게 뜬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라무스는 그가 상념에서 빠져나와 자신에게 시선을 줄 때까지 묵묵히 기다렸다.


“그렇군. 그런 거였어. 피리. 아바루스 왕이 눈이 시뻘게서 찾고 있다는 재생과 번영의 피리, 그게 바로 너였어. 그렇다면 네가 바로 아세르 유바론 대공의 유일한 아들이라는 결론이 나오는구나. 라무스 유바론, 티토니아에서 가장 유서 깊은 가문의 계승자이자 피리 부는 자 플라토르.”


파보르는 제풀에 머리를 주억거렸다.


“인간의 귀로는 들을 수 없는 소리를, 스승님께선 어떻게 들으시는 겁니까?”


“걸려 있던 봉인 해제된 거야. 몇 개월 사이에 어디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니?”


두 사람의 말이 겹쳤다. 서로 다른 말을 하는 걸 알면서도 두 사람이 말을 끝까지 이어간 것은 그만큼 각자의 궁금증이 지대했다는 뜻이리라.


“게르미노에 가서 어머니를 만났습니다. 태고의 버드나무숲에서.”


라무스가 먼저 대답했다. 번개 반도에 대해서는 언급할 수가 없었다. 파트로나의 부탁도 있었거니와 시스와 관련된 일이기 때문이었다.


“동료들 사이에서 네 별명이 길을 잃지 않는 자라고 했지. 난 그게 단지 내가 지리에 대한 지식을 잘 가르쳐서, 네가 명석하고 관찰력과 직관이 뛰어난 아이라서 그런 줄로만 알았는데 그것 이상이었구나. 너에게 살리그네의 피가, 태고의 버드나무숲의 영기가 흐르고 있었어. 넌 땅과 숲의 사랑을 받는 살리그네의 아이였어.”


파보르는 자신의 안에서 여러 의문이 한꺼번에 풀리는 시원함을 느꼈다.


살리그네 가문은 먼 옛날 인간과 정령의 결합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었다. 그 설이 태고의 버드나무숲과 살리그네에 대한 게르미노 사람들의 숭배와 자부심에서 비롯된 단순한 과장법인지, 혹은 진실인지 확인할 길은 없었다.


살리그네는 자손이 번성하지 못했다. 그래서 게르미노 공국은 국주의 지위를 계승할 때 아들딸을 가리지 않았던 것이다. 딸이 공작 지위를 이어받아도 그녀가 낳은 후계자는 살리그네의 성을 이었다. 게르미노의 역사에는 여공작이 적지 않았다.


흠, 맞아. 그렇게 된 거였군. 파보르는 십여 년 전 재생과 번영의 피리를 내세워 페르베아투가 시데레온에 저질렀던 만행을 떠올리며 생각을 정리했다.


게르미노에서 태어난 라무스가 시데레온의 폴루스 니두스에 입성한 이래로 시데레온은 전에 없던 부흥기를 맞았다. 기후가 농사를 돕고 땅이 스스로 비옥해져 해걸러짓기를 할 필요가 없어졌다. 묻혀 있던 고대 유적지가 발굴되었는데, 유적지에서는 대량의 검과 보옥이 나왔다.


일련의 일들을 지켜보면서 라크리모 왕가는 전설 속 피리가 다시 나타났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것이 아세르 유바론 대공의 손에 있다고.


피리를 빼앗기 위해 라크리모는 제법 시간과 공을 들였다. 몇 년 동안 라크리모의 가보인 피리가 사라졌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그리고 마침내 이그노스 대비의 친척인 프리틸라가 페르베아투의 왕성에 방문했을 때 아바루스 왕은 오래 계획해 온 계략을 실행에 옮겼다.


프리틸라를 억류하고, 그녀가 몇 년 전에 왕성에 왔을 때 라크리모의 가보를 훔쳤다는 누명을 씌웠다. 그런 다음 피리를 내놓으라고 아세르 대공에게 정식으로 요구했다. 아세르는 피리 같은 것은 없다고 답변했다. 당연한 답변이었다. 피리는 없으니까. 피리 부는 자가 있을 뿐.


결국 아바루스 왕은 프리틸라의 목숨을 위협해 아세르를 제거했다. 그 후 자문관 파견이라는 형식으로 시데레온 대공국에 간섭 정치를 시행하는 한편 사라진 후계자와 피리를 계속해서 찾고 있는 것이다.


“아바루스 왕은 전설을 제대로 연구하지 않았구나.”


파보르가 혀를 차더니 말을 계속했다.


“전설을 전하는 노래에는 피리 소리가 났다든가, 피리 소리가 들리면이라든가, 피리 소리가 재생과 치유를 가져다주니라든가 하는 대목들이 나올 뿐, 콕 집어서 재생과 치유의 피리라는 말은 없잖니. 그런데 라크리모는 세간에 떠도는 대로 재생과 치유의 피리라는 것이 있다고 믿어 버렸구나. 욕심은 곧잘 사람의 눈과 귀를 가리지.”


고소하다는 듯 파보르의 마지막 말에 웃음이 실렸다.


“이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어찌하여 다른 사람들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것이 스승님께는 들리는지를.”


웃음이 잦아들기를 기다려 라무스가 입을 뗐다.


“내 어머니는 강신 사제였단다.”


“강신 사제…….”


라무스는 언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새벽의 여신의 사제는 순결과 독신을 지켜야 하는 신분이었다.


특히 강신 사제는 태어날 때부터 여신의 신성을 지닌 존재로 아홉 살이 되면 최초 신전으로 보내져 수도 신관이 된다. 수도 신관은 평생을 최초 신전의 수도원에서 살아야 한다. 대사제의 직을 이어받지 않는 이상 예외는 허용되지 않았다.


강신 사제의 수는 극히 적고 거의 명맥이 끊기다시피 했다. 현존하는 강신 사제로는 최초 신전의 클라비스 대사제가 유일하다. 최초 신전의 수도원에도 상비 신관들만 있다. 엄격한 수련과 교육을 받고 시험을 통해 선발되었지만 상비 신관이 수도 신관이 될 수는 없다.


“정확하게는 수도 신관이 되기를 거부한 도망자라고 해야겠지. 어머니께선 평생을 수도원에 갇혀 살기를 원치 않으셨다더구나. 아버지께 들은 이야기다. 어머니는 나를 낳고 돌아가셨다.”


“아홉 살에 자신의 앞날을 스스로 결정하시다니, 조숙하셨네요. 비범하시기도 하고.”


“그래. 그런 분이었다고 하더구나. 자유로운 성향이라면 자유로운 성향이고, 제멋대로라면 제멋대로인.”


파보르가 책상 서랍에서 작은 액자 하나를 꺼내 라무스에게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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