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자물쇠는……!
열쇠가 없는 자물쇠였다.
시스가 아주 어렸을 때, 양어머니와 친척들에 둘러싸여 보배처럼 사랑받던 시절에, 자주 했던 놀이가 있었다. 눈을 가리고 하는 술래잡기였다. 그때마다 양어머니인 페로니아가 하던 말이 있었다.
‘오 시스, 우리 귀염둥이야. 너는 마치 바람 같기도 하고 물 같기도 하구나. 넌 그것들처럼 고요히 흐르는 감각으로 눈을 가리고도 공간의 모양을, 우리의 위치와 움직임을, 정확하게 꿰뚫어 보는구나.’
그랬다. 시스는 눈을 가려 낯선 장소에 데려다 놓아도 벽에 손을 대고 한 바퀴 빙 도는 것만으로 그 장소의 구조를 파악했다. 술래가 되어 보이지 않는 사람들을 쫓아다닐 때도 가만히 선 채로 공기의 움직임을 피부로 느끼다가 단번에 표적을 붙잡아 버렸다.
자물쇠를 따는 일도 마찬가지였다. 시스는 가는 핀으로 자물쇠 안을 더듬는 동안 그 자물쇠가 어떤 키워드 패턴을 숨기고 있는지를 고스란히 감각해 머릿속에 그려낼 수 있었다.
이런 특출함은 결과적으로 친척들이 시스를 꺼리게 되는 이유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페로니아는 물처럼 스며서 주조하듯 찍어내는 시스의 능력을 귀하게 여겼다. 그녀는 시스를 있는 그대로 한결같이 사랑했으니까.
신비하리만치 정밀한 시스의 감각은 그녀에게 속삭였다. 물고기 모양 오팔 자물쇠의 내부에는 키워드 패턴 같은 것이 없다고.
“이 자물쇠를 열 수 있는 열쇠는 없습니다.”
청동 상자를 내려놓고 핀을 도로 옷에 꽂는 시스에게 의문의 시선이 모였다. 이런저런 말들이 툭툭 튀어나왔다.
“가장 유능한 열쇠공이라면 다르게 말할지도 모르지.”
“그 말은 애초에 열쇠를 만들지 않았다는 말입니까?”
“그렇다면 자물쇠를 부수는 수밖에 없는 건가……?”
시스는 다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좌중을 둘러본 다음 인티무스에게 물었다.
“이 청동 상자 자체로도 옛 시대의 유물로서의 가치는 있어 보이는데, 이건 누가 어디에서 발굴한 겁니까?”
공적인 대화인 만큼 시스의 말투는 정중했다.
“하르몬의 융투라 강에서 물고기를 잡아 살아가는 주민이 강에서 건져 올렸다는군요.”
하르몬은 판테라 가의 영지였다. 기후와 지세와 강이 온화하고 비옥하고 조화로워 살기 좋고 부유한 땅이었다.
“융투라 강은 님파 라쿠스와 땅속으로 이어져 있다는 말이 있지요. 먼 옛날 님파 라쿠스에 살던 물의 요정 가운데 하나가 융투라 강으로 옮겨 갔다는 전설도 있고요. 하여튼 하르몬이나 솜다리 언덕에서 발견되는 오팔은 수분에 강하지 않아서 물에 오래 담가 두면 손상되는 것으로 압니다. 그런데 이 자물쇠는 강에서 나왔음에도 아무런 변형도 손상도 없습니다. 이걸 설명할 수 있는 가설은 하나뿐이지 않을까요?”
마지막 한 마디를 거론하지는 않았지만 시스의 말투는 확신에 차 있었다. 인티무스가 그녀를 대신해 말했다.
“주술, 주술로 봉인한 겁니다. 자물쇠를 부숴 봐야 상자는 열리지 않겠지요. 하지만 어느 분이든 자물쇠를 부수어 확인하시겠다면 말리지 않겠습니다. 정말 괜찮습니다. 그러니.”
인티무스는 아까 그 말을 했던 이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나와서 직접 시행하라고.
“아니, 잠깐.”
리마토가 나서서 만류했다. 그는 숱이 적고 짧은 백발을 앙상한 손빗으로 빗어 넘기면서 말했다.
“주술을 먼저 확인하면 될 일이지요. 주술로 봉인하지 않았음이 확실해지면 그때 가서 자물쇠를 부수면 될 일입니다.”
몇 가닥의 은빛 머리카락이 리마토의 손에 집혀 나왔다. 그는 자그마한 은그릇에 머리카락을 넣고 촛불로 태웠다. 그러고는 방 한쪽에 놓인 새벽의 여신 아우로라 상 앞에 헌상되어 있는 물잔을 가져다가 그 물을 은그릇에 조금 부었다.
머리카락의 재와 여신에게 바친 정화수가 섞여 투명하게 반짝이는 액체로 변했다. 리마토는 그 액체를 청동 상자의 물고기 자물쇠에 몇 방울 뿌렸다. 다들 숨죽인 채 지켜보았다. 푸르스름하던 오팔에 물방울이 닿자 붉은 광채가 아른거렸다.
“주술 봉인이 맞았군.”
자물쇠가 부드럽게 열려 원탁 위로 톡 떨어졌다.
“그런데 상자는 왜 안 열리지?”
사람들이 나직하게 술렁였다. 상자를 열기 위해 애쓰던 리마토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는 백주술의 대가였다. 정결한 자의 머리칼과 여신의 정화수가 효과가 없다면 백주술사로서는 더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
“설마…… 흑주술입니까?”
꺼림칙한 기색으로 인티무스가 물었다. 제 아무리 귀한 유물이라도 흑주술이 걸린 물건이라면 최초 사원으로 보내거나 파기해 버리는 것이 옳았다.
“내 이름을 걸고 단언컨대 흑주술은 아니야. 어쩌면 인간의 주술보다 더 강력한 무엇인가일지도.”
리마토가 청동 상자에서 손을 뗐다. 옆으로 비켜나 있던 시스가 그의 옆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홀린 듯 상자를 들더니 품에 꼭 안았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자신이 그 상자를 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자 안의 무언가가 자신을 끌어당기는 것만 같았다.
“아니 무슨 짓을……?”
누군가의 당황한 외침을 시스가 인식했을 때는 이미 그녀가 리마토의 주머니칼로 자신의 손바닥을 긋고 난 뒤였다. 피가 상자 뚜껑을 타고 옆으로 흘러내렸다. 그러자 꽉 맞물려 있던 뚜껑이 철컥 하면서 조금 들렸다. 시스가 뚜껑을 열었다.
좌중이 앞을 다투어 원탁 주위로 몰려들었다. 시스는 상자를 인티무스의 앞으로 밀었다. 하르몬에서 발견된 것이고 그가 기증한 것이니 그가 가장 먼저 확인해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들어 올릴 수가 없어. 이 작은 것을.”
황당하다는 듯 중얼거린 인티무스가 리마토를 돌아보았다. 리마토가 청동 상자 안으로 손을 뻗었으나 그도 인티무스처럼 상자 안의 자그마한 것을 집어 들지 못했다. 그는 상자를 들어 보았다. 들렸다. 다시 상자 안의 것을 들려고 시도했다. 실패했다.
“고작 마른 꽃 한 송이가 왜 들리지 않는 거야?”
사람들이 저마다 시도해 보고는 질렸다는 듯 손을 뗐다. 상자 안에 든 것은 줄기와 잎이 달린 꽃 한 송이, 검게 변색되고 바싹 말라 버린 솜다리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