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 비밀 회합 레콘도

by 화진


여름밤의 싱그럽고 축축한 공기를 흠뻑 들이마시면서 시스는 자신이 이곳을 그리워했다는 걸 인정했다. 오티움의 후원, 코르라고 불리는 연못과 스키엔티아라는 이름의 고풍스러운 석조 건물이 있는 곳이었다.


스키엔티아는 총장과 교수들의 집무실이 있는 본관과 박물관으로 쓰는 별관이 난간 있는 돌다리로 연결된 구조였다. 학생들이 별관으로 건너가려면 교수나 총장의 허가가 필요했다. 하지만 후원은 늘 열려 있었고, 시스는 코르의 수면에 반사되는 풍경을 특히 좋아했다.


“명심해. 넌 어디까지나 오늘밤만 특별히 초대된 손님이라는 거. 오늘밤 이후로는 레콘도라는 게 존재하는지도 모르는 사람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거.”


프로핀의 가발과 화려한 머리 장식으로 치장하여 짧고 색이 탁해진 머리카락을 숨긴 시스를 낯선 듯 돌아보며 인티무스가 한 번 더 당부했다. 레콘도는 비밀 회합이었다. 오티움 출신 중에서도 자기 분야에서 특출한 실력을 인정받는 이들만 회원이 될 수 있었다.


오늘의 레콘도는 인티무스가 오티움에 기증하기로 한 유물의 감정을 위해 소집되었다. 시스에게 예외적인 참관이 허락된 것은 인티무스와 세쿤도 교수 두 사람이 신원 보증인이 되어줬을 뿐 아니라 그녀가 감정에 도움이 될 수도 있으리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그건 걱정 마. 그보다도 넌 정말 괜찮겠어?”


인티무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시스는 그가 자신을 오늘의 레콘도에 데려온 진짜 이유를 잘 알았다. 장소 때문이었다. 유물 감정을 위해 모이는 만큼 박물관 안의 대회의실에서 회합을 하기로 되어 있었다. 오티움의 지하 수장고가 있는 박물관!


“괜찮겠냐니 뭐가 말이야? 별 사고 없이 지나가는 보통의 밤일 텐데.”


무슨 말을 하는지 정말 모르겠다는 듯 인티무스의 대답은 태평했다.


“네 말이 맞아. 비밀스럽지만 무사한 밤이 될 거야.”


태연하게 들리지만 시스의 말은 기도이기도 하고 주문이기도 했다. 시스는 레콘도가 진행되는 사이에 지하 수장고의 안쪽 석실에 틈입할 계획이었다. 은근하게 판을 깔아준 인티무스를 위해서라도, 신원을 보증한 세쿤도 교수를 위해서라도 절대 들켜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시스와 인티무스는 본관 이층의 바깥쪽 회랑을 지나 별관으로 이어지는 돌다리로 통하는 출입구로 갔다. 문을 지키고 있는 사람은 셋이었다. 호위 둘 그리고 리마토 총장.


“넌 여기 서 있다가 총장님께서 부르시면 와.”


얼마간의 거리가 남았을 때 인티무스가 말하고는 먼저 리마토에게로 갔다.


“아디고.”


방명록을 내밀면서 리마토가 말했다. 인티무스는 ‘아듀로’라고 대답하고는 방명록에 서명했다. 회합에 대한 비밀을 지킬 것을 요구하고 맹세하는 절차였다. 두 사람이 무슨 말을 주고받는지 시스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호위들이 문을 열어주자 인티무스가 시스를 한 번 돌아보고는 들어갔다. 문이 닫히자 리마토가 시스에게 손짓했다.


“넌 여기에다 맹세하렴. 오늘밤에 보고 들은 모든 것을 내일로 가져가지 않겠다고.”


리마토가 출입문 옆 벽감에 세워 둔 성상을 가리켰다. 새벽의 여신 아우로라였다.


“맹세합니다.”


“들어가거라.”


안부의 말을 입에 담지는 않았지만 리마토의 눈빛은 시스에게 인자했다. 시스도 표정에만 인사와 감사를 담았다. 청강생인 시스가 거의 정식 학생이나 다름없이 오티움을 활보할 수 있었던 배경에 리마토 총장의 은근한 비호가 있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스키엔티아의 돌다리를 처음 건너는 것도 아닌데 시스는 또각또각 울리는 발소리를 들으며 약간의 긴장감이 들었다. 인티무스도 정색한 채 묵묵히 걸었다.


대회의실에는 이미 꽤 많은 사람이 와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말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각자 자신이 편한 자리에 앉거나 선 채로 책을 보거나 사색에 잠겨 있었다. 시스가 아는 얼굴도 더러 있었다.


시스와 인티무스는 자신들을 돌아보는 몇몇에게 묵례했다. 그들도 가볍게 묵례하고는 이내 시선을 돌렸다. 세쿤도 교수와도 짧은 눈인사만 나누었다. 레콘도 회합은 원래 사적인 대화가 오가지 않는 자리였다.


인티무스는 가운데의 원탁 옆에 앉고 그 뒤의 기둥 옆에 섰다. 몇 사람이 더 들어오고 마지막으로 리마토가 들어와 문을 닫았다. 그리고 그는 벽장에서 청동 상자 하나를 꺼내 와 원탁 위에 올렸다. 푸르스름하게 빛나는 물고기 모양의 자물쇠가 걸려 있었다.


“새로 기증된 유물입니다. 자물쇠를 풀지 못했지요. 오늘밤에 이 자물쇠를 풀어 내용물을 감정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말을 마친 리마토가 마음껏들 시도해 보라는 뜻으로 좌중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몇 명이 나서서 자신이 가진 만능열쇠 혹은 옷핀이나 철사 등등으로 시도해 보았으나 자물쇠는 끄덕도 하지 않았다.


지켜보던 세쿤도가 시스에게 눈짓했다. 네가 한 번 풀어보라는 의미였다. 세쿤도는 시스가 자물쇠나 걸쇠를 푸는 데에 남다른 재능이 있다는 걸 알고 있는 사람 가운데 하나였다. 시스는 자신이 이 폐쇄적인 모임에 초대받은 까닭이 바로 그 재능에 있음을 깨달았다.


심호흡을 하면서 시스는 원탁으로 다가가 청동 상자를 들어 올렸다. 귀에 대고 흔들어 보았다. 희미하게 무언가가 부딪는 소리가 났다.


“상자 안에 무언가 작은 물건이 들어 있는 듯합니다. 흔들었을 때 들리는 소리가 부드러운 걸로 미루어 상자 안쪽 면을 가죽이나 두꺼운 천으로 덧댄 것 같습니다.”


상자를 내려놓은 시스는 바닥에 무릎을 대고 눈높이를 자물쇠에 맞춰 유심히 관찰했다.


“자물쇠가 오팔인 것 같은데 진짜 오팔은 아닐 겁니다. 꼬리 부분을 보니 원래는 짐승의 뼈나 뿔이었던 것 같습니다. 뼈나 뿔이 땅에 묻힌 채 오랜 세월이 지나 오팔처럼 변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거든요.”


시스는 옷에 꽂고 있던 긴 핀을 빼내 자물쇠에 꽂았다. 귀를 가까이 가져다 대고 핀을 이쪽으로 저쪽으로 움직였으나 열리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 다음 연재는 연휴 지나고 10일에 올리겠습니다. 행복한 한가위, 즐거운 연휴 보내시기를요.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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