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 페르비아의 제안

by 화진


주점 안에 있던 사람들이 심상찮은 분위기를 낌새채고 우르르 몰려나왔다. 산양뿔 주점의 널찍한 안마당에 둥근 인파의 벽이 만들어졌다. 이만한 구경거리는 실로 오래간만이었다. 자문관 가투스 라크리모가 싸움질이나 난동에 지나치다시피 엄격한 처분을 내리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마침 이 흥미로운 소요의 중심에 가투스의 딸인 페르비아가 있으므로 사람들은 마음 놓고 들뜰 수 있었다. 벌써 몇몇은 뜨내기와 기사 닉티 중 누가 이길 것인가를 두고 내기를 걸고 있었다. 당연히 닉티의 우세를 점치는 이들이 많았다.


사태가 이쯤 되니 몬스도 구경꾼이 되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안으로 들어가 등받이가 있는 깨끗한 의자를 들고 나와 페르비아의 뒤에 놓았다. 페르비아는 거기 앉는 대신 한 발을 올려 디디고 등받이에 팔을 기댔다.


본의 아니게 인간 울타리로 둘러쳐진 검투장에 서게 된 라무스는 침착하게 궁리하는 중이었다. 페르비아 라크리모, 저 여자는 도대체 왜 이런 짓을 벌이는 건가.


닉티는 과묵한 사내인 모양이었다. 자신의 검으로 라무스의 검을 가리킴으로써 어서 검을 들라는 말을 대신했다. 라무스는 어쩔 수 없다는 기분으로 검을 뽑아 들었다.


그때 사람들 틈에서 불공정하다는 지적이 튀어 나왔다. 닉티와 달리 뜨내기는 투구나 흉갑 등의 보호 장구를 아무것도 갖추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닉티가 말없이 투구와 흉갑을 벗어 던졌다.


“다들 기다리는 거 안 보여?”


페르비아가 차갑게 재촉했다. 닉티가 쏜살같이 발을 내딛으며 검을 찔러 들어갔다. 사전 동작에서 이미 검의 궤적을 예측한 라무스는 순식간에 옆으로 빙글 돌아 피했다. 다시 자세를 고른 닉티가 이번에는 검을 양쪽으로 휘둘러 베면서 전진했다.


‘진짜로 죽이거나 죽거나 하겠다는 거잖아?’


아직 마음을 정하지 못한 라무스는 난감했다. 죽이려면 죽일 수야 있겠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곁눈질로 페르비아를 살폈다. 그녀의 진회색 눈이 먹잇감을 가지고 노는 맹수처럼 반들반들 빛났다.


라무스는 피하고 방어하는 것만으로는 이 무의미한 싸움을 끝낼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지각했다. 페르비아는 자신의 호위 기사를 응원하는 눈빛이 아니었다. 그녀는 순수하게 즐기고 있었다.


둘 중 누가 죽든 패배는 그녀에게 돌아가지 않는 것이다. 누가 살아남든 최종적인 승리자는 페르비아인 것이다.


쓰디쓴 침을 삼키며 라무스는 검을 고쳐 잡았다. 죽이지는 않더라도 피를 보는 건 피할 수 없다. 닉티의 검술과 습관은 웬만큼 파악했다. 라무스가 땅을 박차고 뛰어 올랐다. 닉티는 물러서면서 검을 쳐들어 막았다.


방향이 틀렸다. 라무스의 검은 비스듬히 뒤에서 날아왔다. 라무스가 공중에서 몸을 틀어 닉티의 옆쪽으로 착지한 것이다. 닉티의 허벅지 뒷면에서 붉은 피가 울컥 솟아 흘러내렸다. 닉티는 한쪽 다리가 꺾여 주저앉았다.


“여기까지.”


피 묻은 검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며 라무스가 남의 얘기하듯 내뱉었다. 구경꾼들 사이에서 욕설과 환호성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자, 이걸로 닦아.”


페르비아가 다가와 라무스에게 손수건을 내밀었다.


“검이 더럽혀지는 게 꽤 싫은가 봐?”


“이런 식으로 무의미하게 검에 피를 묻히는 게 즐거울 리야 없죠.”


라무스는 손수건을 받지 않고 구경꾼들이 던졌던 모자 가운데 하나를 주워 검을 닦았다.


“이름이 뭐야?”


거부당한 손수건을 땅에 던져 버리면서 페르비아가 물었다. 그녀의 시녀가 손수건을 주웠다.


“와고르, 라고 해두죠.”


“와고르? 떠돌이 기사에게 어울리는 이름이네. 검술은 제법 쓸 만하던데, 떠돌이 기사라니. 둘 중 하나겠군. 가문을 이을 신분이 안 되는 아들이거나, 죄를 지었거나.”


좋을 대로 생각하라는 표정으로 라무스는 검을 검집에 넣었다. 닉티는 다친 다리를 살펴보려는 동료들을 완강히 물리친 채 페르비아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라무스가 마뜩잖은 눈으로 닉티와 페르비아를 번갈아 응시했다. 그제야 페르비아가 명했다.


“데려가서 치료해.”


닉티가 사람들의 부축을 받아 안으로 들어가자 라무스가 마구간을 향해 발을 뗐다. 산양뿔 주점에 머물려던 마음이 싹 가셨기 때문이다.


“거기 멈춰, 와고르. 너한테 가도 좋다고 말한 기억이 없는데?”


젠장! 라무스는 속으로 욕을 했다. 그러나 겉으로는 씨익 웃으며 뒤를 돌았다.


“설마하니 방금 쓰러뜨린 그 자의 자리를 이 뜨내기에게 주시기라도 하려고요?”


“원한다면 그것도 가능하고.”


페르비아가 작위적인 미소를 띠었다.


“고맙지만 사양하지요.”


“실은 다른 제안을 할까 해.”


라무스의 곁으로 바투 다가간 페르비아가 그의 얼굴을 가까이 올려다보았다.


“내 결투 기사가 되어 줘. 이겨만 준다면 사례는 아주 넉넉하게 하겠어.”


너라면 틀림없이 이길 거야. 페르비아는 확신했다. 디위나 할멈의 말이 맞았다고.


디위나 할멈은 예지력 있는 주술사였다. 페르비아는 디위나 할멈에게 들었다. 산양뿔 주점에서 자신을 구해줄 기사를 만나게 될 거라고. 그래서 전용 자리까지 만들어 산양뿔 주점을 뻔질나게 드나들었던 것이다.


“그것도 사양합니다.”


라무스는 거절하며 손을 들어 보이고 페르비아를 비켜서 다시 걸었다.


“잠깐만. 그렇게 가 버리면 이 아이가 너무 가엾지 않겠어?”


뒤에서 페르비아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했다. 이상해서 돌아본 라무스의 눈에 어이없다 못해 경악스러운 장면이 들어왔다. 페르비아가 자신의 시녀의 목에 단검을 대고 있었다. 라무스가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녀를 죽이겠다는 뜻이었다.


페르비아보다 조금 어려 보이는 시녀는 입술과 어깨를 바르르 떨며 라무스를 건너다보았다. 살려 달라는 말조차 입 밖으로 내지 못했지만 커다란 두 눈에 들어찬 공포와 애원은 참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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