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고 굳어 있지만 그 꽃이 본디 땅에 뿌리를 박고 살아 있었던 진짜 꽃임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그 작고 가벼운 것을 누구도 들어서 꺼낼 수 없다는, 당연해야 할 것이 당연하지 않은 상황은 적잖은 파장을 일으켰다.
리마토와 인티무스가 시스를 돌아보았다. 다른 이들의 시선도 차례로 그들을 따라 시스에게로 모였다. 시스가 상자를 흔들면서 안에 든 작은 것이 든 것 같다고, 흔들림이 부드럽다고 했던 말을 상기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네가 한 번 시도해 보라고.
시스는 작게 끄덕이고 상자 안으로 손을 뻗었다. 손이 꽃에 닿는 순간 심장이 갈라지는 듯한 아픔이 엄습했으나 이내 가라앉았다. 곧 주위에서 소리 죽인 탄성이 퍼져나갔다. 검은 색의 마른 꽃이 시스의 손에 너무나 가볍게 들려 올려졌다.
자기 안에서 순간적으로 명멸하는 수많은 느낌과 고통 때문에 시스는 잠시 주위를 다 잊었다. 전에 없었던 거대하고 깊은 감정이었다. 이게 다 무엇인지 어디에서 말미암은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시스의 손에서 꽃가지는 시시각각 변모했다. 연노랑 꽃술이 풍성하고 연둣빛 도는 흰색의 꽃잎이 싱싱한 살아 있는 꽃이 되었다가. 다시 새빨갛게 변했다. 눈이 시릴 정도의 붉은 빛에 젖은 꽃은 마치 선혈을 뒤집어쓴 듯 섬찟해 보였다.
지켜보는 사람들은 흥분과 충격 속에 말을 잃었다.
붉었던 꽃이 다시 검고 마른 꽃으로 돌아오더니 재 같은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거무스름한 가루가 상자 바닥에 내려앉자 고대의 문자가 드러났다. 마치 얇게 편 흙 위에 쓴 글자처럼.
사자의 발이 증언하리라.
분노의 어두움을.
비탄의 무게를.
시스가 정신을 차리고 그 글귀를 눈에 담고 나자 솜다리꽃의 가루는 눈이 녹듯이 사라지고 상자만 덩그렇게 남았다. 그리고 시스는 정신을 잃었다.
‘오랜만이야. 시스.’
의식의 저편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아니나 다를까 꿈마녀가 서 있었다.
‘아, 백작 부인. 말리티아를 직접 고발하지는 못했지만 다른 사람에게 부탁해 뒀어. 그녀가 흑주술을 하는 마가고 마물들의 폐허에서 불온한 일을 꾸미고 있는 것 같다는 제보를 최초 신전에다가 해 달라고 말이야. 말을 전할 사람이 믿을 만한 사람이니까 최초 신전에서 나서줄 거야. 그런데 옷차림이…… 바뀌었네?’
하녀 복장을 한 꿈마녀가 멋쩍게 웃었다.
‘이게 진짜 내 옷이야. 그래, 난 정식 백작 부인이 아니야. 하지만 백작님과 내가 결혼한 건 틀림없는 사실이야. 우리 도련님을 내가 낳은 것도, 말리티아 그 사악한 마가 년이 나타나서 행복했던 내 가정을 망쳐버린 것도 사실이고. 나, 제대로 된 기억을 찾았어. 이름도 기억났어. 라멘타. 내 이름은 라멘타야.’
‘전보다 훨씬 편안해 보여. 라멘타.’
‘네 덕분이야. 시스. 여기, 아름답지? 내가 살던 곳이야.’
비탈진 녹색의 농경지와 푸른 숲, 거기를 휘돌아 흘러가는 맑고 힘찬 내를 라멘타가 자랑스럽게 가리켰다.
‘여기, 텔룸 외곽의 구릉지 같은데? 옛날에 몰락했다는 에로르 백작 가의 별장 터가 있는.’
‘맞아. 나의 백작님이 바로 그분이셨어. 나의 도련님 그러니까 내 아들의 이름은 레스토였고. 여기에서 우린 행복했어. 영지의 저택으로 돌아가지 말았어야 했는데.’
‘에로르 가문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잖아.’
시스가 조심스레 말했다. 이제 꿈마녀도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어느 정도 담담하게 바라보고 또 받아들이는 것으로 보였다.
‘맞아. 가문은 몰락했어. 하지만 실제로 대가 끊긴 건 아니야. 나의 레스토에게 후손이 있었어. 다른 이름으로, 귀족이 아닌 신분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그건 라멘타에게 기쁜 일이겠구나. 정말 다행이야, 라멘타. 아! 솜다리꽃이네. 지금은 여기 솜다리꽃이 없는데 라멘타가 살던 시절엔 있었나 봐?’
‘백작님께서 먼 곳에서 구해다가 여기 별장 정원에 옮겨 심으셨었어. 돌아가신 부인께서 좋아하셨거든. 내가 정성 들여 가꾸었고.’
시스는 정신을 잃기 전에 경험했던 일이 떠올라 어깨를 살짝 떨었다. 검은 솜다리꽃, 그것을 손에 들었을 때의 불가사의한 느낌.
‘돌아가신 레이디께서는 좋은 분이셨어. 나에게 많은 걸 가르쳐 주셨지. 그분의 조상님들께선 솜다리꽃을 사자의 발이라고도 불렀다는 얘기도 들려 주셨어. 사자의 발이라니 재미있지? 꽃잎이 사자의 발톱을 닮았다나, 발바닥을 닮았다나.’
‘사자의 발톱?’
시스의 눈이 번쩍 빛났다. 아아, 그게 솜다리꽃을 가리키는 말이었구나. 그렇다면……!
‘라멘타. 미안하지만 나 이만 돌아가 봐야 할 것 같은데. 깨어나게 해줄래? 참, 그리고 우리 또 꿈에서 만날 수 있는 거지?’
‘알았어. 아마 또 만날 수 있을 거야.’
라멘타가 산뜻하게 대답하고는 손가락을 딱 튕겼다. 순간 시스는 깨어났고 걱정스러운 눈으로 자신을 보는 세 사람을 발견했다. 인티무스, 세쿤도 교수, 리마토 총장이었다. 시스는 자신이 낯선 방의 안락의자에 반쯤 눕다시피 기대어 있음을 깨달았다.
“시스. 괜찮아? 네가 쓰러지는 걸 보고 시약으로 상자를 검사했는데 독이나 해로운 성분은 없었어.”
인티무스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시스에게 다가왔다.
“괜찮아. 그런데 너도 봤어? 상자 바닥에 나타났던 문자.”
안락의자에서 일어나려는 시스를 리마토가 손짓으로 만류했다. 대신 그를 비롯한 세 사람이 시스의 주위에 의자를 가져와 앉았다.
“우리 세 사람 다 봤단다. 상자 가까이에 있었던 다른 사람들 몇몇도 봤을 테고.”
대답한 것은 세쿤도였다.
“사자의 발이 증언하리라. 분노의 어두움을. 비탄의 무게를.”
리마토가 천천히 읊었다.
“혹시 아시는 분 계세요? 사자의 발이 뭔지?”
시스가 세 사람의 눈을 차례차례 들여다보며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