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로부터 사람들은 신비로운 가설을 세우는 것과 거기에 기대어 미지의 보물을 찾는 꿈을 꾸기를 좋아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세쿤도 교수가 입을 열었다.
“그런 이들에게 님파의 서는 매우 그럴듯한 단서로 보일 게다. 님파의 서를 제대로 해독함으로써, 인간의 진입을 거부하는 님파 라쿠스의 풍랑을 잠재우고 얼어붙은 루쿠스를 녹여 섬에 숨겨진 보물을 차지하겠다는 시도 또한 실제로 비밀리에 종종 있어 왔고. 하지만 그 누구도, 그 어떤 해석과 시도도 성공하지 못했단다. 그런데 시스. 넌 이 이야기와 거의 같으면서도 좀 다른 얘기를 하는 것 같구나. 힘이라고 했지? 그래, 네가 생각하는 요정 시대의 힘이라는 건 어떤 것이냐?”
침착한 질문이었다. 시스는 그에게 수업을 듣던 시절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었다. 세쿤도는 고대의 기록이 새겨진 금석문이나 석판을 가져와 보여주고는, 글자나 그림이 희미해져 해석하기 모호한 부분을 두고 학생들에게 이런 식으로 질문하고 토론을 시키곤 했다.
“인간의 능력으로는 구사할 수 없는…… 힘이겠죠. 주문도 매개물도 필요치 않은, 마법 같은 거 아닐까요?”
리마토 총장과 인티무스는 가만히 두 사람의 대화를 경청했다.
“요정들이 쓰던 마법이라. 일단 그렇다 치자꾸나. 그럼 그 마법이 섬 전체를 덮고 있는 얼음을 녹이고 루쿠스로 들어가는 자의 소유가 된다는 얘기냐? 과연 한낱 인간이 요정의 마법을 소유하고 사용할 수가 있을까?”
세쿤도의 물음에 시스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고대의 기록과 전승을 숱하게 연구했고 요정이나 정령 그리고 그들의 신비한 능력에 대한 묘사도 더러 본 적이 있기는 했다. 그들의 능력을 부러워하거나 시기하고 욕심낸 인간들에 대한 기록도 더러 있었지만 결론은 항상 그 능력은 인간의 영역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네 말대로 님파의 서를 둘러싼 새로운 음모가 있다 쳐도 네가 걱정할 일은 아니다. 솜다리 언덕과 호수와 섬의 숲은 예나 지금이나 최초 신전에서 은밀하게 주시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최초 신전에서요?”
“당연하지. 최초 신전과 대사제는 새벽의 여신을 대리하여 어둡고 사악한 무리들에 맞서 티토니아를 수호할 의무가 있잖느냐.”
“그렇다면야 저로서도 안심이죠.”
“내가 염려되는 건 너란다. 청동 상자가 네 손에 열리고 그 안에 봉인되어 있던, 저주인지 경계인지 모를 전언이 네 손에 의해 드러났다. 그런데 이렇게 된 것이 우연의 운명인지 필연의 운명인지 알 수가 없지. 만약 저주라면 네가 그 저주를 받은 것인지 저주의 실행자인지, 경계를 주는 말이라면 네가 그 경계의 주체인지 아니면 조력자인지, 그저 넌 우연히 이 일에 말려들었을 뿐 무관한 제삼자인지. 지금으로서는 전혀 알 수가 없으니. 게다가 너희들 말대로 검은 솜다리꽃이 솜다리 언덕에서 난 거라면…….”
인티무스가 다급하게 말꼬리를 잘라 들어왔다.
“그 말씀은 이 일을 최초 신전에 보고해야 하고, 만약을 대비해 시스를 최초 신전에서 지켜보게 될 거라는 말씀이십니까?”
감시라는 말을 쓰고 싶지 않아서 인티무스는 지켜본다는 완곡한 말을 골랐다. 세쿤도는 답을 하지 않았지만 그게 원칙이라는 건 인티무스도 시스도 알고 있었다.
“이해해요. 원칙대로 하셔야죠. 그리고 최초 신전에 보고하고 신전의 지시가 올 때까지 전 이곳을 떠날 수 없는 거죠?”
시스는 쓰게 웃었다.
“그렇지.”
한참을 묵묵히 듣기만 하던 리마토 총장이 마침내 목소리를 냈다. 그의 낯빛은 변함없이 인자했고 어조는 느긋했다. 리마토는 워낙 무슨 생각을 하는지 속에 뭐가 들었는지 짐작하기 힘든 인물이었다.
시스는 가뜩이나 곤란한 처지가 한 번 더 꼬여 버린 현실이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한 시라도 빨리 가장 오래된 유물을 찾아 심장을 빌린 자가 무엇을 가리키는지 알아내야 했다. 이 일이 수포로 돌아간다면 곧바로 상티모네의 심장꽃 쪽을 탐색해야 했다.
얼마 안 남은 그녀의 수명을 시간은 착실히 야금야금 갉아먹는 중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런데 당분간 텔룸을 떠날 수 없고, 최초 신전에서 지시가 오면 거기에 따라야 한다고? 시스는 암담한 속내를 의연한 표정 아래에 숨겼다. 순종하는 것처럼 보여야 몰래 도망치기가 더 쉬울 터였다.
“그럼 세쿤도 교수. 최초 신전에 보고서를 보내는 일을 맡아 주겠소? 지금 즉시 말이오.”
“예, 총장님.”
세쿤도는 시스에게 격려의 눈빛을 보내고는 방을 나갔다.
“인티무스. 잠시 자리를 비켜 주겠나?”
“예? 아,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인티무스는 문을 향해 걷는 동안 두 번도 넘게 시스를 돌아보며 의문스러워했다. 의아하기는 시스도 마찬가지였다. 문이 닫히는 걸 확인한 리마토가 선반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돌로 깎은 약병 같은 것이 늘어선 선반이었다.
“왼손을 내밀어 봐라.”
약병 하나를 들고 시스에게로 온 리마토가 뚜껑을 열면서 말했다.
“왜요? 뭘 하시려는 겁니까?”
“너에게 해로운 일을 하려는 게 아니다. 뭘 좀 확인해 보려는 거야.”
하긴, 리마토가 시스를 해할 작정이었다면 손을 내밀라느니 할 것도 없이 벌써 해치우고도 남음이 있었을 것이다. 시스는 순순히 손바닥을 내밀었다. 리마토가 그녀의 손 안에 약병 속 약물 몇 방울을 떨어트렸다. 그것은 평범한 물처럼 투명하고 아무 냄새도 없었다.
뭘 확인하시겠다는 걸까? 연분홍 혈색이 도는 손바닥에 고인 액체를 시스는 궁금증과 호기심이 뒤섞인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자, 이제 닦아도 된다. 수건이 필요하면 줄까?”
“아뇨, 괜찮습니다.”
시스는 손바닥을 다른 쪽 소매에 쓱쓱 문질렀다. 약물이 아무런 변화를 보이지 않았으니 별일 없는 거겠지. 그런데…… 이건 뭐지? 시스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