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네 말은 사자의 발이 말 그대로 사자의 발이 아니라 다른 뜻을 내포하고 있다는 거구나?”
머리를 가로 흔들던 인티무스가 말했다.
“정황상으로 보자면 그건 하나밖에…….”
“어두움은 곧 검은빛, 아무나 들지 못할 무게.”
세쿤도와 리마토의 중얼거림이 겹쳐졌다. 듣고 있던 인티무스가 급한 마음에 두 사람의 다음 말을 가로챘다.
“솜다리꽃! 흩어져 사라진 검은 솜다리꽃!”
“맞아. 옛날에 솜다리꽃을 사자의 발이라고 불렀던 사람들이 있었대.”
“그들이 누구인지도 아느냐?”
리마토의 목소리가 굳어 있었다.
“그것까지는 모릅니다. 어디선가 지나치듯 주워들은 거라서요.”
꿈에서 들었다고 말하면 신빙성이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시스는 말을 지어냈다.
“잘 기억해 봐라. 흩어진 솜다리꽃의 잔해가 새겼던 글귀는 분명히 저주였어. 그리고 하필 그것이 네 손에……. 어쩐지 염려가 되는구나. 그들이 누구인지 알아내 이 찜찜한 의문을 제대로 풀지 않으면 안 될 것 같구나.”
세쿤도의 말에 인티무스의 낯빛이 새하얗게 질렸다. 자신이 시스를 위험에 빠트렸을지도 모른다는 자책 때문이었다. 시스를 여기에 데려온 건 그녀를 돕고 싶어서였다. 그녀라면 재주껏 가장 오래된 유물이 있다는 석실로 들어갈 방도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데려오지 말았어야 했어. 후회가 밀려왔다. 열쇠를 훔쳐내든 리마토를 설득하든, 시스가 원하는 것을 손에 넣기를 바라는 순수한 마음으로 한 일이었다. 자신이 기증한 청동 상자와 시스가 이렇게 나쁘게 엮일 줄은 꿈에도 모른 채.
“인티무스. 그런 얼굴 할 것 없다. 청동 상자와 시스 사이에 우리가 모르는 어떠한 연관이 있는 게 틀림없다면 언제든 어떻게든 결국 일은 이렇게 됐을 게다. 네가 잘못한 게 아니다. 알아듣느냐?”
리마토의 말이 옳다는 건 인티무스도 인정했다. 그래도 인티무스의 마음의 짐은 가벼워지지 않았다.
“그리고 청동 상자에 봉인되어 있던 것이 저주인지 아닌지 아직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다. 어쩌면 그 문구와 솜다리꽃은 저주가 아니고 오히려 경계의 말일 수도 있지 않을까?”
인티무스를 향해 말하던 리마토가 말의 끄트머리를 세쿤도에게로 향했다.
“일리 있는 말씀입니다. 시스, 네 느낌은 어떠니?”
세쿤도의 질문을 받은 시스는 뭐라고 선뜻 말할 수가 없었다. 꽃을 들었을 때의 느낌이라면 괴롭고 암울했다. 그런데 그것이 저주하는 자의 감정인지 저주를 경고해주는 자의 감정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또한 이상하게 그 느낌을 타인에게 고스란히 내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혼란스러운가 보구나. 그럴 수 있지.”
다행히 세쿤도는 시스의 침묵을 이해해 주었다.
“실은 제가 사자의 발 얘기를 꺼낸 건 다른 질문이 있어서예요.”
시스가 꿈속에서 사자의 발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다급하게 떠오른 것이 있었다. 다피넬의 서재에 숨어 들어가서 훔쳐봤던 청금석, 거기에 새겨져 있던 님파의 서 전문. 거기에도 사자의 발이라는 표현이 있었던 것이다.
왜 그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시스는 꿈에서 님파의 서를 떠올리자마자 라무스에게 전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사자의 발에 대해. 그러니까 붉은 사자의 발이 무엇인지.
그것은 붉은 사자의, 발, 이 아니라고. 붉은, 사자의 발, 이라고. 그리고 자신은 보았다고. 검은, 사자의 발을. 검은 사자의 발이 붉은 사자의 발로 변하는 광경을 보았다고.
왜지? 왜 그 사실을 그에게 알려야 한다는 묵시와도 비슷한 예감이 들었던 거지?
왜 그런 마음이 들었는지 시스 스스로도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차분히 헤아려 보니 라무스에게 알리려야 알릴 방법도 없었다. 그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그가 어디에 있든 정확하고 안전하게 편지를 전해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페로도 곁에 없으니.
아아 페로. 네가 곁에 있다면 좋을 텐데. 내 생명의 불꽃이 꺼져 버리기 전에 널 다시 볼 수 있을까?
가슴을 가득 채운 상념을 덮어 버리는 헛기침을 한 번 하고 시스가 본론을 꺼냈다.
“님파의 서, 말이에요. 혹시 그 전체를 알고 계시나요?”
인티무스를 제외한 두 사람의 눈빛이 살짝 변했다.
“거기에도 사자의 발이 나오잖아요.”
“시스 너, 님파의 서 전문이 새겨져 있다는 청금석을 찾은 거야? 어디에서?”
리마토는 예상했다는 듯한 표정이었고, 세쿤도는 궁금증을 참지 못했다. 인티무스는 놀라는 동시에 자신이 이 자리에 계속 있어도 괜찮을까를 고심했다.
“죄송해요. 그것에 대해서는 말씀드릴 수 없어요. 다만 말씀드릴 수 있는 얘기는 이런 거예요. 님파의 서의 비밀을 풀어 오래 전 요정 시대의 힘을 차지할 수 있다고 믿는 무리가 있는 것 같아요.”
의뢰를 받아 다피넬이 소장한 청금석을 보러 들어갈 때만 해도 시스는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었다. 요정 시대의 힘을 되살릴 수 있다느니 하는 건 그저 부풀려진 소문으로 치부했던 것이다. 그러나 최근 불가사의한 일들을 잇따라 겪으면서 세상을 보는 시각이 달라졌다.
“예감이 좋지 않아요. 아까 상자에서 나온, 사자의 발이 증언하는 분노의 어두움, 비탄의 무게라는 글귀도 어쩐지 님파의 서와 무관하지 않은 것 같고요.”
“그리고 이쪽과 저쪽의 사자의 발이 결국 같은 것을 가리킨다는 말이지? 둘 다 같은 솜다리꽃을 의미하는 거라고?”
확인하는 세쿤도에게 시스가 고개를 끄덕했다.
“그러고 보니 아까 네가 들고 있을 때 솜다리꽃이 잠깐이지만 붉게 변했었지.”
복잡한 눈빛으로 리마토도 수긍했다.
“청동 상자가 나온 곳이 제 고향의 융투라 강이잖습니까? 님파 라쿠스의 물이 땅 아래의 물길로 융투라 강으로 흘러든다고 하지요. 순전히 제 추측이지만 청동 상자 안에 있었던 솜다리꽃은 원래 솜다리 언덕에 피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나도 같은 추측을 하고 있었어.”
시스가 인티무스의 말에 힘을 실었다. 인티무스의 낯빛이 조금 맑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