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선선한 미풍이 불어왔다. 로스 레갈리스 곳곳에 조성된 화단과 정원의 꽃과 나무와 잎들이 내뿜는 여름 향기가 바람을 타고 날아다녔다. 결투장의 흙냄새와 땀 냄새 그리고 피 냄새가 꽃향기에 뒤섞여 시스의 코를 불쾌하게 자극했다.
라무스가 검에 피를 바르는 것을 본 시스는 코르푸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가 다시 아바루스 왕을 건너다보았다.
‘아는 걸까, 모르는 걸까?’
결투가 어느 정도 진행된 시점부터 시스는 코르푸스를 의혹의 눈으로 관찰했다. 그는 실력이 출중한 기사였지만 시스가 보기에는 어딘지 이상했다. 그에게는 자연스러운 표정이 없었다. 비록 눈만 내놓았다지만 사람의 표정이란 눈썹과 눈꺼풀, 눈꼬리에도 드러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코르푸스는 싸우는 내내 눈꺼풀도 눈썹도, 눈꼬리도 최소한의 움직임조차 없이 단단히 굳어 있었다. 세상 누구도 의지만으로 저처럼 무표정할 수는 없었다. 시스는 사람에게서 표정을 지울 수 있는 한 가지 경우를 알고 있었다. 불행히도 경험을 통해 알게 된 그것.
사람을 살아 있는 인형으로 만드는 흑주술.
코르푸스가 살아 있는 인형 기사임을 시스가 거의 확신한 것은 싸움 중에 들려온 어떤 목소리 때문이었다.
‘귀빈들께서 지루해 하시잖아. 본때를 보여줘. 죽여’라는 말을 했던, 목이 아닌 뱃속 저 안에서 은밀하게 흘러나오는 듯했던.
그때 시스는 목소리의 진원지를 찾아 객석을 두리번거렸지만 찾지 못했다. 그 소리를 낸 자가 바로 흑주술을 건 장본인일 텐데.
이상한 점은 더 있었다. 코르푸스는 검을 휘두르는 라무스의 동작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하게 모방하여 단번에 자신의 것으로 소화했다. 시스가 보기에 그것 역시 또 다른 흑주술의 힘 같았다.
기이한 능력을 지닌 흑주술의 기사를 상대하는 라무스가 시스는 견딜 수 없이 염려되었다. 그래서 그만 위기의 순간에 ‘피해!’ 하고 외치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그건 자신의 입을 때리고 싶도록 어리석은 짓이었다. 라무스가 이쪽을 돌아보느라 틈을 보여 부상을 당했으니까.
라무스의 어깨가 피로 젖는 것을 보았을 때 시스는 놀라우리만치 충격을 받았다. 그 순간 시스는 머리의 사고 능력을 잃은 듯했고 심장이 덜컥 의자 아래로 떨어지는 듯했다. 라무스의 무사함을 제외하고는 세상에 의미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느낌이었다.
그 느낌이 당황스러운 시스는 그것을 크나큰 충격으로 정의했다.
‘그래, 난 충격을 받은 거야. 그는 내 생명의 은인이니까, 그런 사람을 내가 위험에 빠트렸으니까, 충격을 받고 혼란스러운 건 당연하잖아.’
호각세인 결투를 조마조마하게 지켜보던 시스는 라무스가 옆구리에 두 번째 부상을 입었을 때 비명을 삼키며 스스로의 입을 틀어막았었다.
그리고 지금, 시스는 아바루스 왕을 예의주시하고 있지만 그가 결투장의 흑주술에 대해 아는지 모르는지는 가늠해낼 수 없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코르푸스를 조종하는 기묘한 목소리가 아바루스 왕의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라무스는 자신의 피로 살아 있는 인형 흑주술을 파훼해 보려는 걸까? 과연 그게 가능할까?’
흑주술이 피를 매개로 하며, 반드시 반력을 동반하기에 반력을 흡수할 희생양을 필요로 한다는 얘기를 라무스에게 해준 것은 시스였다. 하지만 다른 누군가의 피로써 흑주술을 깨트릴 수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서로 나눈 적이 없었다.
‘실패하면 어쩌지? 어떻게 해야 그를 구할 수 있을까? 결투장으로 몸을 날려 뛰어내려 버릴까? 그의 앞을 가로막고 서서 내가 그를 대신하겠다고 하면……. 우리에게 돌아올 것은 조롱과 비웃음과 의문밖에 없겠지. 나는 위병들에게 끌려나오고 그는 웃음거리가 된 채 계속 싸워야 하겠지.’
시스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흔들 때 라무스가 피 묻은 검으로 코르푸스를 공격했다. 검은 그의 왼손에 들려 있었다. 따라서 이제까지 코르푸스가 보고 고스란히 익혔던 검술이 아닌 새로운 검술이었다. 코르푸스는 그것을 또 모방하고 습득하기 위해 얼마간 방어에 치중할 터였다.
어둡지만 맑은 하늘에서 번쩍 때 아닌 마른번개가 쳤다. 그 눈부심이 어찌나 강렬했던지 잠시 동안 사람들은 눈앞의 세상이 새하얗게 표백되는 경험을 했다. 결투장의 모든 사람이 동시에 눈을 잠시 감았다.
단 한 사람만이 예외였다. 라무스는 눈부심을 이겨내고 두 눈을 부릅뜬 채 그 짧은 순간에 목표 지점을 겨냥하여 검을 던져 날렸다.
“와아아아아아.”
객석이 환호성으로 뒤흔들렸다. 라무스의 피 묻은 검은 정확히 코르푸스의 심장으로 날아가 꽂혔다. 코르푸스는 비명이나 신음조차 지르지 못한 채 그대로 뒤로 쓰러졌다. 결투의 심판관을 맡은 시종장 루크룸이 내려왔다. 그가 코르푸스를 살피더니 일어서서 큰 소리로 선언했다.
“코르푸스 사망. 승자는 레이디 페르비아 라크리모의 결투 기사, 와고르!”
안도의 긴 한숨을 내쉬는 시스를 라무스가 올려다보고 있었다. 루크룸이 손수건으로 라무스의 피 묻은 손을 닦아 주고 나서 물었다.
“와고르. 누구의 치하를 받겠소?”
왕이 주관하는 결투의 승자는 객석의 누구에게든 치하를 청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루크룸은 응당 레이디 페르비아의 이름이 나오리라고 예상했다.
“누구인지 모를, 저기 저 얼굴을 가린 레이디께 치하를 받겠습니다.”
라무스가 시스를 가리켰다.
시스와 라무스의 눈이 거리를 두고 정면으로 마주쳤다. 이제 시스가 객석 끝으로 나아가 라무스에게 자신의 허리띠에 꽂은 꽃이 됐든 끼고 있던 레이스 장갑이 됐든 지니고 있는 소지품을 던져주면서 한 가지 부탁을 들어주겠노라고 말할 차례였다.
티티아 왕비 옆에서 오만한 기쁨을 누리고 있던 페르비아는 이를 사리물고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녀는 모멸감을 감추기 위한 차가운 미소를 띤 채 황급히 자리를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