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무스는 일부러 뜸을 들였다. 코르푸스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이리저리 발을 움직이며 몇 차례 검을 새로 겨누기만 했다. 코르푸스는 라무스와 비슷한 움직임을 보였다.
이러한 대치 상태가 그리 오래 가지도 않았는데도 객석에서 야유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목숨을 건 싸움에 내던져진 자들의 시간과 자극적인 구경거리를 원하는 자들의 시간은 다르게 흐르는 법이었다.
‘이봐, 코르푸스. 찌르든 베든 먼저 좀 들어와 보라고. 저들이 아무리 야유하고 욕지거리를 뱉어도 이번엔 절대로 내가 먼저 검을 휘두르지 않을 작정이니까.’
라무스가 눈빛과 눈가 표정으로 도발했다. 그러나 코르푸스는 무반응이었다.
“귀빈들께서 지루해 하시잖아. 본때를 보여줘. 죽여!”
어디선가 저음이지만 귀를 파고들고 느긋한데도 위압감을 주는 독려의 말이 날아왔다. 성별을 짐작할 수 없는 미묘한 음색이었다. 그래서일까. 복화술로 하는 말 같기도 했다.
라무스가 목소리에 대해 생각할 때 코르푸스는 즉각적으로 몸을 날렸다. 미묘한 목소리라는 활시위가 코르푸스라는 화살을 쏘기라도 한 것 같은 장면이었다.
위쪽에서 사선으로 내려오는 검을 라무스는 반사적으로 검을 들어 쳐냈다. 날과 날 사이에서 빛이 튀었다. 코르푸스가 순식간에 자세를 바꿔 이번에는 심장을 겨누고 찔러 들어왔다. 라무스는 방패를 들면서 몸을 돌렸다. 코르푸스의 검이 방패를 깊이 그으면서 비껴나갔다.
몰아치는 비바람처럼 코르푸스의 공세가 쏟아졌다. 기어코 죽이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느껴졌고, 구사하는 갖가지 검기에는 코르푸스 자신의 것과 라무스를 모방한 것이 훌륭하게 혼합되어 있었다. 라무스는 코르푸스가 뛰어난 검술을 지닌 기사임을 알 수 있었다.
머리 위의 객석에서 흥분 섞인 짧은 고함들이 날아다녔다. 더, 더, 더! 그거야! 해치워! 피해! 겁쟁이! 안 돼! 반격해! 죽여 버리라고!
끈기 있게 방어만 하던 라무스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저기에 섞여 있을 리 없는, 귀에 익은 목소리를 들은 듯했다. 라무스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목소리를 좇아 고개를 돌렸다. 순간 코르푸스의 검이 번쩍였다. 라무스는 방패를 듦과 동시에 몸을 틀었지만.
늦었어! 라무스는 뼈아프게 깨달으며 시선을 다시 코르푸스에게 고정했다. 방패는 두 동강이 났고 왼쪽 어깨가 뜨거웠다. 뜨듯한 액체가 팔을 타고 흘러내렸다. 코르푸스는 이참에 끝장을 내겠다는 듯 다시 달려들었지만 한참 동안을 쇄도한 탓에 호흡이 가빴다.
방패를 내던진 라무스는 코르푸스의 검을 쳐내면서 뒷걸음치다 별안간 몸을 옆으로 날려 방향을 바꿔 버렸다. 그리고 돌아서는 코르푸스의 옆구리를 향해 검을 찔러 넣었다. 코르푸스는 물러서면서 방패로 막았다. 방패는 뚫렸지만 검은 그의 옆구리에 닿지 못했다.
라무스도 호흡이 거칠어졌지만 코르푸스만큼은 아니었다. 왼팔을 흔들어 어깨뼈까지는 상하지 않았음을 확인한 라무스는 반격을 계속했다. 이번에는 코르푸스가 뒤로 점점 물러나고 라무스가 전진했다. 라무스의 검은 바람에 물결치는 버드나무처럼 코르푸스를 향해 뻗어나갔다. 어느 모로 보나 결투는 백중세였다.
‘속임수를 쓰지 않을 수 없는 결투도 있다.’
녹스 용병단의 대장 네우테르의 가르침을 라무스는 가슴에 잘 새기고 있었다. 목숨이 걸린 혈투에서는 승리가 곧 긍지다. 속임수도 결투의 일부다. 녹스 용병은 살아남는 것으로 증명한다. 네우테르는 그렇게 가르쳤다.
펄쩍 뛰어오른 라무스가 검을 휘두르는 동시에 코르푸스의 방패를 걷어찼다. 검으로 검을 막던 코르푸스의 다른 손이 방패를 놓쳤다. 라무스는 코르푸스의 복부를 노렸다. 코르푸스가 복부를 방어할 때 라무스의 검은 이미 왼손에 옮겨 들린 채 더 위쪽을 향하고 있었다.
라무스는 왼손 검술도 오른손 검술 못지않았다. 피나는 훈련의 결과였다.
코르푸스의 왼쪽 가슴이 피에 젖었다. 라무스는 자신의 검이 얼마나 치명적인 깊이까지 찔렀는지 알았지만 객석에서는 알지 못했다. 코르푸스가 쓰러지지 않았으므로.
‘검으로는 죽일 수 없는 흑주술의 기사.’
디위나 할멈의 경고가 라무스의 눈앞에서 엄연한 현실이 되었다. 코르푸스가 자신의 가슴을 장갑 낀 손으로 쓱 닦더니 얼굴에 두른 천에 가져다 대고 숨을 들이켰다. 코와 입 부분이 피로 젖었고 코르푸스는 기운을 차렸다.
다시, 코르푸스의 거센 공격이 시작되었다. 코르푸스는 괴기스러웠고 더 강해졌다. 라무스는 필사적으로 피하고 막고 쳐내면서 궁리에 궁리를 거듭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흑주술의 기사를 쓰러뜨릴 수 있단 말인가.’
정신없이 공격하던 코르푸스가 호흡과 자세를 가다듬기 위해 잠시 멈추었다. 구석에 몰린 라무스는 자신의 오른쪽 옆구리에도 상처가 났음을 그제야 알았다. 다행히 치명상은 아니었다. 숨을 고르면서 라무스는 생각했다. 이 뒤쪽의 어디쯤이었는데, 시스의 목소리가 났던 것이.
시스를 생각하다 보니 그녀와의 기억이 빠르게 뇌리를 스쳤다. 그리고 문득 떠올랐다. 그녀와 자신이 번개 반도의 과일과 물을 먹었다는 사실이. 또한 자신이 플라토르 즉 피리 부는 자라는 사실이. 그리고 시스에게서 들었던, 흑주술은 반드시 피를 매개로 한다던 말도.
그렇다면……. 라무스는 마음을 정했다. 결과는 장담할 수 없지만 시도해 볼 만한 방법을 찾았던 것이다. 라무스는 옆구리의 상처에서 흐르는 피를 닦은 손으로 검의 날을 길게 쓸었다.
‘여신이시여, 굽어 살피소서. 어둠에 물들지 않은 피로써 어둠에 물든 자를 정화할 수 있도록 가호를 베풀어 주소서.’
검에 피를 묻히는 라무스의 행동이 객석의 흥분을 증폭시켰다. 결투의 끝을 보기를 원하는 열띤 함성이 귀가 아플 정도로 높았다.
장밋빛이었던 투리스가 어느새 연한 회색으로 변해 있었다. 노을이 사라진 서쪽 하늘은 청회색이었다. 땅거미가 묽게 스민 결투장 곳곳에 횃불이 내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