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 라무스의 부탁

by 화진


모든 이목이 라무스와 시스에게 집중됐다. 흥미로운 광경이었다. 결투장의 하급 기사와 객석의 귀족 레이디라는 신분의 차이. 둘 다 똑같이 얼굴을 가리고 눈만 내보이고 있는 특이한 우연의 일치. 그들의 젊음, 가려진 얼굴이 불러일으키는 추측과 신비…….


방금 전까지 결투의 승패와 죽음에 열광하던 사람들은 시스와 라무스를 좋은 여흥거리로 삼았다. 은근한 속닥거림과 소리 죽인 가벼운 웃음이 탁류처럼 떠다녔다.


라무스는 낯설게 치장하고 얼굴을 감춘 레이디의 눈을 통해 그녀가 시스임을 확신했다. 그리고 그 순간에 들었던 감정에 황급히 안도감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래, 난 그저 함께 생사의 갈림길을 넘나들었던 동료의 무사함에 마음이 놓이는 것뿐이야.


‘왕에게 데세르티온 프레케스와의 결혼이 무효라는 인정을 받기 위해 여기 와 있었던 건가? 일단 아직은 씩씩하고 기운차 보이지만……. 살아날 방법은 찾고 있는 건가?’


말리티아의 흑주술 때문에 시스가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음을 아는 라무스는 염려 어린 눈빛을 건넸다.


시스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깜빡 잊고 있었다. 그녀와 라무스가 서로를 응시한 채로 시간이 지체되었지만 아무도 재촉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 어디선가 침 삼키는 소리가 났다.


“레이디……?”


헛기침을 하고 나서 루크룸이 나섰다.


“승리자에게 아무것도 내리지 않으실 겁니까? 정 그러시다면 어쩔 수 없지요.”


아마 전하와 왕비께서도 이해하실 겁니다, 라고 말하기 위해 루크룸이 아바루스 왕 쪽으로 시선을 옮기는데 시스가 움직였다.


“와고르. 이것으로 그대의 승리를 치하하지요.”


시스는 자신의 자리 옆 협탁에 차려져 있던 과일 가운데 무화과 하나를 집어다가 라무스에게 던졌다. 시스가 자신이 지녔던 소지품이 아닌 엉뚱한 것을 택하자 구경꾼들의 열기가 조금 식었다. 시스가 노렸던 바였다.


“기꺼이 받지요. 감사합니다. 레이디.”


무화과를 받은 라무스는 그 자리에서 우적우적 먹어 버렸다. 시스가 귀찮다는 말투로 자시이 해야 할 말을 했다.


“나에게 부탁할 것이 있나요? 가능하다면 들어주도록 하지요.”


부탁의 내용에는 제한이 없었다. 노래나 악기 연주를 부탁하는 사소한 것에서부터 영지를 내려달라는 요구까지, 뭐든 말은 해볼 수 있는 것이다. 단, 들어주는 것은 치하하는 자의 재량이었다. 따라서 어느 정도 관행적인 선이라는 건 있었다.


관행을 따르려면 손등 키스 정도를 말하는 것이 적당하다는 건 라무스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라무스는 달리 생각해 둔 것이 있었다.


“레이디께 드릴 제 부탁은 별것 아닙니다. 내년의 아이스타스 축제 때 이 와고르의 이름으로 동전을 던져 행운을 빌어 주십시오.”


아이스타스 축제는 카푸의 여름이 절정일 때 열리는 축제였다. 온갖 꽃들이 만발한 미니안테스 광장의 수많은 분수가 일제히 물을 뿜어 올리면서 시작된 축제는 사흘 동안 이어진다. 올해의 아이스타스 축제는 시스가 카푸에 오기 전에 이미 지나갔다.


아이스타스 축제 기간 동안 사람들은 분수의 물에 동전을 던지며 행운을 기원하는데, 타인을 위해 빌어야만 이루어진다는 속설이 있다.


라무스의 시시한 부탁에 사람들은 흥이 깨진 표정으로 수군댔다. 고작 그거냐, 욕심이 없는 거냐 멍청한 거냐, 그 따위 헛소리 빨리 철회하고 다른 부탁을 해라, 등등의 불평과 참견도 튀어나왔다.


단 한 사람, 시스만이 라무스가 한 부탁의 진가를 알았다. 살아 있으라는 부탁, 내년 여름까지 살아남으라는. 이미 시스의 남은 일 년에서 한 계절 정도가 깎인 시점이었다. 방법을 찾지 못하면 시스는 내년 여름을 볼 수 없을 터였다.


‘그러니까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서 살아 있어 줘. 당신이 할 수 있는 걸 내가 알아.’


라무스가 남들의 이목 때문에 하지 못한 말까지 시스는 들을 수 있었다.


“듣고 보니 쉬운 부탁이군요. 좋아요. 꼭 그럴게요. 꼭.”


대수롭지 않다는 듯 가벼운 말로 응수하고 시스는 돌아섰다. 이제 완연한 밤이었고, 객석의 사람들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티티아 왕비가 시스에게 오라고 손짓했다. 티티아는 시스가 자신의 후견을 받는 미지의 귀족 처녀임을 확실히 보여주려는 것이었다. 그러면 며칠 내로 오늘 시스를 관심과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던 귀족 사내들이 자신에게 선물을 보내며 시스에 대해 물어올 테니까.


시스는 티티아의 가식적인 손에 손을 잡힌 채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무감한 묵례를 거듭해야 했다. 시스를 가까이에서 보려고 일부러 티티아 왕비에게 인사를 하러 오는 귀족들이 남녀를 불문하고 제법 있었다.


병사들이 와서 코르푸스를 들것에 실어 나갔다. 라무스는 코르푸스의 주검에서 보통의 시신과 다른 점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피부색이 약간 더 희푸른 것 같기는 했다.


“대단하더군. 자네 혹시 왕의 친위대에 들어올 생각은 없나?”


자리를 뜨려다 말고 루크룸이 물었다.


“글쎄요. 아시다시피 저는 레이디 페르비아의 사람이라.”


“아, 그랬지. 레이디 페르비아는 누가 자기 것을 빼앗는 꼴은 못 보시는 분이지. 그러나 자네만 좋다면 나에게 다 수가 있지. 생각 좀 해보게나.”


루크룸이 어깨를 툭 치고 갔다. 라무스는 다시 고개를 들어 시스의 뒷모습을 눈에 담았다. 그녀는 티티아 왕비에게 딱 붙들려서 아직도 객석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페로가 돌아왔어. 당신의 머리 위 하늘에 있어. 푸른 별들 사이에서 희게 빛나고 있는데. 아, 내려오는군.”


라무스는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희고 빛나는 점은 가까워질수록 새의 형상이 되었다. 예전과 같은 모습이었다.


어떤 예감에 시스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희고 날개가 작은 동그란 새를 발견했다.


‘페로! 돌아왔구나, 페로!’


페로는 잠깐 허공에 멈춰 시스에게 인사하듯 몸을 흔들었다. 그러더니 시스의 시야 뒤로 날아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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