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쓰지 마십시오.”
시스가 새로 입은 드레스의 목깃 부분을 정리해주면서 프론스가 짧고 빠르게 속삭였다. 시중을 들기 위해 꼭 필요한 말만 하던 프론스가 시스에게 처음으로 건넨 불필요하지만 온기 있는 한마디였다. 왕비가 보낸 애젊은 세 시녀는 몹시 과묵했다. 왕비가 미리 단속해둔 것이리라.
“그래야지. 따지고 보면 틀린 말도 아니고.”
남의 얘기인 듯 시스의 태도는 가볍고 산뜻했다. 시스의 표정이나 언행에서 상처 받은 기색이라고는 조금도 배어나지 않자 그녀를 구경거리 삼던 눈과 귀 들은 흥미를 잃어갔다.
파티장은 그야말로 티티아 왕비가 지배하는 작은 세상이었다. 파티가 시작되기에 앞서 그녀는 시스를 소개했다. 시스가 결투장에서 치하를 내렸던 그녀였음을 밝힌 다음 시스의 결혼이 모종의 중대한 하자로 무효가 되었으며 시스가 혼인 침대에 든 적이 없음을 밝혔다.
아바루스 왕은 왕비하고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춤을 추었다. 이후로는 줄곧 시종장 루크룸과 페르베아투의 두 재상 중 한 명인 암비티오와 셋이 앉아 밀담을 나누었다. 세 사람의 자리는 단상 위에 있었고 아무도 얼씬하지 못하도록 위병이 지키고 있었다.
티티아는 거의 계속 시스에게 붙어 있었다. 그녀는 시스의 팔짱을 끼고 데리고 다니면서 자신이 그녀를 아끼는 것처럼 굴었다. 아름답고, 명목상이기는 하지만 포르미두사의 공녀라는 사실만으로도 꽤 비쌀 테지만 거기에 왕비가 사랑하는 친척이라는 인상이 더해지면 몸값은 더욱 뛸 테니까. 티티아 왕비는 시스의 양어머니인 페로니아와 친인척 관계였다.
시스는 티티아에게 떠밀려 이 귀족 저 귀족과 춤을 춰야 했다. 춤 자체는 싫지 않았지만 같이 추기 싫은 상대들과도 춰야 하는 건 고역이었다. 그렇지만 시스는 잘 참아냈다. 모든 춤 상대를 존중했고 예의를 지켰다. 춤을 청하는 이들에게는 잘못이 없었다. 잘못은 거절할 기회를 원천 봉쇄한 티티아에게 있었다.
페르비아는 페르비아대로 파티를 즐겼다. 그녀의 환심을 사고 싶어 하는 젊은 귀족들에 둘러싸여 추고 싶은 만큼 춤을 출 수 있었다. 또한 그녀와 친해지고 싶은 귀족 레이디들은 앞다투어 그녀에게 친절과 배려와 아첨을 늘어놓았다.
왕비의 관심이 시스에게 가 있는 것도 페르비아는 전혀 거슬리지 않았다. 계산속이 있음을 뻔히 알기 때문이었다.
“다음 곡도 저와 추시겠습니까? 오늘밤 제가 함께 춤추고 싶은 분은 오직 레이디 페르비아뿐이거든요.”
춤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아리두스가 페르비아에게 물었다. 아리두스는 재상 암비티오의 아들로 카푸 최고의 미남이었다.
수많은 처녀들이 선망의 눈으로 흘깃거리는 것이 기분 좋아서 페르비아는 그와 한 곡 더 추기로 마음먹었다. 아리두스가 자신 외의 다른 여자에게 춤을 청하지 않으리라는 뜻을 넌지시 전한 것도 흡족했다.
“그래요. 한 곡 더 춰요.”
생글거리는 얼굴로 페르비아는 아리두스와의 두 번째 춤을 시작했다. 날갯짓하는 나비처럼 유려하게 춤추던 페르비아의 얼굴에서 어느 순간 미소가 사라졌다. 시스 때문이었다.
아니 시스의 춤 상대 때문이었다. 그는 페르비아에게 춤을 청한 적이 없었다. 시스를 제외하고는 다른 누구와도 춤추지 않았다.
페르비아는 시데레온에서 지내면서도 가끔씩 오직 파티를 즐기기 위해 카푸로 돌아오곤 했다. 그러나 아직까지 본 적이 없었다. 지금 시스와 춤을 추는 저 청년이 춤을 추는 장면을. 그러니까 하르몬의 후계자 아키피오 판테라가 저토록 고상하고 근사하게 춤추는 것을.
‘춤을 못 춘다고 하지 않았어? 거짓말을 했군. 카푸의 모든 여자들에게.’
그리고 감히 나에게도. 페르비아는 몹시 불쾌해졌다. 아키피오는 눈매를 부드럽게 휜 채로 지은 채 자주 말을 시키고 그때마다 시스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둘의 모습을 티티아 왕비가 흐뭇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아리두스는 이따금씩 페르비아를 칭찬하는 말을 하는 것을 잊지 않았지만 다 그렇고 그런 흔한 소리였다. 참을 수 없는 웃음을 자아내는 재치 있는 말이라든가 사소하더라도 마음을 두드리는 말, 그런 것은 아리두스의 머릿속에도 가슴속에도 없는 듯했다.
갑자기 아리두스의 건조한 성격이 페르비아에게 두드러진 단점으로 다가왔다.
‘그런데 설마 왕비께서는 나이아시스를 아키피오에게 팔고 싶으신 건가?’
하르몬의 판테라 가는 티토니아 전역에서 가장 부유한 가문이었다. 재물과 사치에 죽고 못 사는 티티아 왕비라면 하고도 남을 생각이었다. 페르비아는 왕비의 의도가 못마땅했다. 시스에게 아키피오는 분에 넘쳐도 한참 넘쳤다.
한편 시스는 싫증나던 파티가 아키피오 덕분에 재미있어졌다. 아키피오와는 그의 형 인티무스로 말미암아 친분이 있었다.
“프로핀이 오늘을 무척이나 기대했는데 바로 이틀 전부터 항아리손님병 증세가 시작돼 버린 거야.”
아키피오가 웃으면서 볼을 부풀려 보였다. 항아리손님병은 그리 심각한 건 아니지만 볼이 항아리처럼 부어오르고 아직 앓지 않은 사람에게는 전염도 된다.
“저런, 딱해라. 안 그래도 프로핀이 카푸에 있다는 얘기를 들어서 혹시 오늘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기대했거든. 근데 프로핀이 아닌 널 볼 줄이야. 어쨌든 반가운 얼굴이 하나라도 있어서 위안이 된다.”
시스가 스스럼없이 아키피오의 팔에 기대 허리를 젖혔다 펴고는 다시 손을 잡고 돌았다.
“프로핀이 아닌 내가 와서 다행이지. 프로핀은 너에게 너무 버릇없이 구니까.”
“오늘 같아서는 프로핀의 구박조차 차라리 다정하게 들릴 것 같아.”
“내가 잠깐 시간을 벌어 줄까?”
아키피오는 시스의 마음이 편치 않음을 알아차렸다.
“그럴 수 있어?”
“걱정 마.”
티티아 왕비 쪽에 눈길을 주며 아키피오가 자신 있게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