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는 맞지 않아. 이 궁전도, 이런 치장도, 억지로 끌려가는 파티도.’
티티아 왕비의 나긋하고 집요한 손에 팔을 꽉 잡힌 채 화려하게 장식된 복도를 걸으면서 시스는 가까스로 참고 있었다.
소리 내며 하품을 하고 싶었고 사지를 뻗어 기지개를 켜고 싶었고, 힘껏 달려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그러나 자신이 경거망동하면 곤란해질 사람들이 있었다. 이그노스 대비와 클라비스 사제. 그들에게 불똥이 튈 것이 뻔하기에 참아야 했다.
‘그래. 오늘밤까지만이야. 티티아 왕비의 상품 노릇을 하는 건 이것으로 끝이야.’
복도 끄트머리의 커다란 문 앞에서 티티아는 시스를 놓아 주었다.
“들어가서 옷을 갈아입고 파티장으로 오렴. 아까 널 도와줬던 시녀 아이들이 안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야. 아, 이건 이제 필요 없어.”
티티아가 시스의 얼굴을 가린 레이스를 걷어 치웠다.
“지금부터는 네가 얼마나 예쁜지 보여줄 시간이야. 흠, 그러고 보니 무효가 된 그 결혼을 하기 전보다 더 예뻐진 것 같구나? 타키툼의 물과 와인이 피부에 좋다더니 그 때문인가?”
흡족하게 웃으며 티티아가 문 안으로 시스를 떠밀어 넣었다.
어색하게 방으로 들어선 시스에게 프론스, 그라멘, 헤르바 세 시녀가 종종걸음으로 달려왔다. 셋은 시스를 그녀의 자리로 데리고 갔다. 옷 갈아입는 방은 아름다운 천과 나무틀로 만든 칸막이로 공간을 나누어 놓았다. 공간마다 이름표가 붙어 있었다.
티티아 왕비는 시스에게 좋은 자리를 배정해 놓았다. 창문이 가까워 로스 레갈리스의 밤풍경과 밤하늘이 내다보이고 좌우와 앞으로 다른 공간들이 다 보였다.
칸막이의 높이는 시스의 코 바로 아래 정도였다. 시스보다 키가 큰 레이디들은 칸막이 위로 얼굴 전체가 드러났고, 키가 작은 레이디들은 주변이 궁금하면 까치발을 하거나 제자리 뛰기를 해야 했다. 젊은 처녀들은 서로를 흘깃거렸고 옆자리의 친한 친구와 속닥거리기도 했다.
세 시녀의 대장 격인 프론스가 시스의 드레스를 능숙하게 벗겨 주었다. 시스는 순순하게 겉옷을 벗고 손 씻는 그릇에 손을 넣었다. 새하얀 연꽃 한 송이가 담겨 있어 은은한 향기가 피어올랐다. 연꽃 물에 손을 씻는 건 결투장의 좋지 않은 기운을 정화하는 의식이었다.
그라멘은 수건으로 시스의 손을 닦은 다음 장미수를 바르고, 헤르바는 시스의 가발과 머리 장식을 다시 매만졌다. 프론스는 능숙한 손놀림으로 시스의 화장을 고쳐 주었다.
“나이아시스 글라키에사? 아니지. 나이아시스 프레케스 공작 부인이라고 해야 하나? 어쨌거나, 맞지?”
칸막이 너머로 얼굴 하나가 불쑥 올라왔다. 페르비아 라크리모였다. 페르비아는 티티아 왕비에게 얼굴을 가린 레이디가 시스라는 얘기는 들었지만 시스의 결혼이 무효가 된 사실은 아직 듣지 못했다. 티티아는 곧 있을 파티에서 시스의 얼굴과 함께 그 사실을 공개할 참이었다.
시스와 페르비아는 그동안 이렇게 얼굴을 마주할 기회가 없었다. 페르비아가 로스 레갈리스에 살았던 시절에는 시스가 텔룸에 있었고, 시스가 결혼 문제로 카푸에 불려와 있던 시기에는 이미 페르비아가 시데레온에 가 있었기 때문에.
“나이아시스는 맞고, 프레케스 공작 부인인지 뭔지는 아니고. 레이디 페르비아.”
친절한 말투로 시스가 대답했다. 주위가 조용해지더니 수많은 눈초리가 시스와 페르비아를 주시했다.
“공작 부인이 아니라니…… 결혼 생활에 문제가 생겼나 보네? 그랬구나. 그래서 새 남편감을 물색하느라 그렇게 한껏 휘황찬란하게 꾸미고 나타난 거구나? 사내들 호기심 부채질하느라 얼굴까지 가리고?”
페르비아가 우아하고 느릿한 어조에 빈정거림을 담았다. 그러고는 안타깝다는 듯 쿡 웃었다. 그 웃음소리는 다른 처녀들에게 주는 신호였다. 다들 웃어도 돼. 여기 레이디 나이아시스를 마음껏 비웃어도 된다고.
귀족 처녀들의 웃음으로 옷 갈아입는 방 안이 물결치는 밀밭처럼 수런거렸다.
“그런 셈이지.”
시스는 페르비아를 향해 그리고 다른 여자들을 향해 여유로운 미소를 보냈다. 자신을 이렇게 만들어 놓은 사람이 티티아 왕비임을 밝혀 봤자 페르비아는 좋은 핑계라고 받아칠 것이다. 재미도 없고 얻을 것도 없으리라. 차라리 이렇게 나가는 게 적어도 시스 자신은 재미있었다.
“카푸의 귀족들에 대해서라면 레이디 페르비아가 잘 알 테니 새 남편으로 누가 괜찮은지 슬쩍 귀띔이라도 해 주면 고맙겠는데?”
처녀들이 벌어지는 입을 막으며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저렇게 뻔뻔하다니!
“그래? 어디…… 누구와 어울리려나. 생각 좀 해볼까? 레이디 나이아시스가 포르미두사의 글라키에사 공녀이긴 하지만 원래 부모도 모르는 고아잖아? 아니, 사생아라고 해야 정확한가? 그런 출신과 어울리는 남편감을 추천하는 게 쉽지가 않네?”
독설을 날린 페르비아가 고민스럽다는 듯 손가락을 턱에 댔다. 그러고는 입모양으로 ‘불쌍도 하지’라고 덧붙였다. 시스를 바라보는 눈빛들에 경멸이 어리고 웅성거림 속에 비난이 섞였다. 페르비아는 결투장에서 받은 모욕을 소소하게나마 갚아줬다는 쾌감을 느꼈다.
“이런. 내가 너무 어려운 부탁을 한 건가? 난 또 일명 로스 레갈리스의 아침해라고 불릴 만큼 똑똑한 레이디 페르비아라면 그런 어려운 부탁도 눈 하나 깜짝 않고 해결해 줄 줄 알았지 뭐야.”
시스는 해맑은 웃음을 머금었다. 물보라가 빛을 만나 만드는 무지개와도 같은 아름다움이 시스를 얕잡아 보던 처녀들의 기를 죽였다. 무엇이 어떻게 되었든 그 방 안에 시스만큼 빛나는 미소를 가진 여자는 없었으니까.
“그러니까 말이야. 이 페르비아마저도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천하지를 말지 그랬어? 아, 그건 네 잘못은 아니지?”
벽에 걸린, 줄 달린 종이 댕그렁댕그렁 울렸다. 서두르라는 알림이었다. 페르비아는 의기양양하고 차가운 비웃음을 던지고 뒤돌아 나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