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가는 루크룸의 등을 보며 라무스는 시스에게 썼던 편지 내용을 떠올렸다. 그리고 스스로를 원망했다.
어차피 부탁을 할 거였으면 그런 식으로 쓰는 게 아니지. 무시해도 된다는 둥 부담 갖지 말라는 둥, 그런 한가하고 소리를 왜 썼어? 나 참. 그녀에게 산뜻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었나? 그 무슨 쥐뿔같은 허세야…….
아무리 생각해도 독 안에 든 쥐 신세였다. 스스로의 힘으로는 옴치고 뛸 도리가 없는 지경이었다. 시스의 도움이 없으면 이 안에서 피를 빼앗기다가 결국에는 죽음에 이르리라.
루크룸이 말했던 바대로 곧 깨끗한 옷과 음식이 왔다. 그것들을 가져온 이는 루크룸의 직속 시종이었다. 나이는 라무스와 비슷해 보이고 체구는 왜소한 편이며 늘 표정이 뚱한 자였다. 라무스는 루크룸이 그를 무투스라고 부르는 걸 들은 적이 있었다.
“저기, 무투스. 내가 얼마 동안 정신을 잃고 있었던 건가?”
창살 아래의 틈으로 식사를 담은 트레이와 옷을 들이밀던 무투스는 대답은 고사하고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이건 아침 식사인가, 저녁 식사인가?”
무투스는 아무것도 못 들었다는 듯이 그냥 가 버렸다. 라무스는 헛숨을 뱉고는 트레이를 들고 안쪽으로 가서 식사를 했다. 삶은 달걀과 양젖으로 만든 치즈와 호밀빵, 그리고 복숭아. 고기나 생선은 없었지만 그만하면 훌륭한 한 끼였다.
식사를 끝낸 라무스는 빈 그릇이 담긴 트레이를 창살 쪽으로 가져다 놓고는 바닥을 살피고 다녔다. 뾰족한 모서리가 있는 돌멩이를 주워들자 이번에는 동굴 벽에서 비교적 편평한 곳을 찾았다. 찾아서 돌로 줄 하나를 그어 새겼다. 첫 번째 식사를 했다는 표식이었다.
얼마 동안이나 정신을 잃고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짧으면 반나절쯤에서 길게 잡아도 하루는 넘지 않을 듯했다. 일단 그 시간은 무시하고 여기서 보내는 시간을 대략적으로나마 헤어 나가겠다는 심산이었다.
빛이 들지 않는 지하 동굴에 갇혔으니 기준을 식사에 두는 수밖에 없었다. 식사는 하루에 두 번 제공될 가능성이 높았다. 아침과 저녁일 것이다. 식사를 할 때마다 돌로 표식을 남기면서 식사가 온 시간 간격을 어림잡아 생각해 보면 하루 두 번인지 세 번인지 확실해질 것이다.
‘피는 언제부터 뽑으려고 들까? 부상에서 완전히 회복하기를 기다리는 건가?’
피를 빼앗기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사악한 무리에게 보탬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여건에서는 어쩔 수 없다. 저들은 무슨 수를 쓰든 원하는 것을 가져갈 것이다. 그것이 피가 됐든 목숨이 됐든, 거리낌 없이 간단하게.
식사와 새 횃불과 깨끗한 옷을 가져오는 건 언제나 무투스였다. 무감정해 보이고 말이 없는 무투스. 라무스는 그가 올 때마다 대수롭지 않은 이런저런 말을 시켜 보았지만 반응을 얻지는 못했다.
세 번째 식사가 왔을 때 라무스는 두 번의 간격이 거의 비슷한 시간적 길이였다는 느낌을 토대로 식사가 하루 두 번 아침과 저녁에 오고 있다는 결론을 얻었다. 갇히자마자 첫 식사를 했으니까 이제 지하 감옥에서 꼬박 하루를 보낸 것이다.
라무스는 녹스 용병단에서 자랐으므로 이런 구속의 시간이 낯설지 않았다. 정기적으로 받는 훈련 과정에도 이와 비슷한 상황이 있었다. 굶주림까지 더해진다는 점에서는 오히려 훈련 쪽이 혹독했다.
생각은 적게 하고 몸은 자주 움직이면서 라무스는 적응해 나갔다. 흙바닥에는 이런저런 그림들이 그렸다 지워지고 한쪽에는 조약돌로 된 성이나 탑이 생겨났다 허물어졌다. 의미는 없었다. 그저 놀이였고 시간 때우기였다.
다섯 번째 식사가 올 때가 되었다 싶을 무렵 루크룸이 다시 나타났다. 친위대장 페레우스 그리고 어두운 잿빛 망토와 두건, 후드로 온몸과 얼굴을 빈틈없이 가린 누군가를 대동하고.
라무스는 어두운 잿빛에 감싸인 인물이 여자일 거라고 생각했다. 체구와 체형과 그의 직감이 그렇게 지목했다.
“이리로 와 봐.”
루크룸이 명령했다. 라무스는 느릿느릿 창살 앞으로 갔다. 그러자 잿빛의 여자가 창살 가까이로 왔다. 그녀가 라무스의 얼굴을 향해 손을 뻗었다. 라무스는 뒤로 물러나 그녀의 손을 피했다. 젊지는 않지만 희고 고운 손, 풍겨오는 달콤한 향내. 달콤하지만 어쩐지 거북했다.
잿빛의 여자가 후후 웃었다. 웃음소리에서도 적지 않은 나이가 느껴졌다. 페레우스가 활을 들었다. 화살 끝이 라무스의 이마를 겨누더니 다리로 내려갔다.
“와고르. 그 안에서 화살 피하기 놀이 같은 거 해 봐야 너만 손해라는 걸 모를 만큼 멍청하지 않잖아. 자, 자. 피차 헛심 쓸 것 없이 깔끔하게 가자고. 이리 와서 이 분께 잠시 손을 내어 드려. 별 일 없을 테니까.”
루크룸이 귀찮다는 투로 말했다. 그의 말이 옳다는 사실 때문에 라무스는 기분이 나빴지만 하릴없이 다시 창살 쪽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창살 안쪽에서 손을 들어 올렸다. 잿빛의 여자가 그의 손에 무슨 짓이라도 하려면 창살 사이로 자신의 손을 넣어야 했다.
창살의 틈은 손이 몇 개는 드나들 수 있을 만큼 여유가 있었다. 잿빛의 여자는 망설임 없이 손을 집어넣었다. 그 순간 라무스는 그녀의 손을 꽉 잡고 당겼다. 그녀가 창살 쪽으로 훅 끌려왔다.
잿빛의 여자는 놀랐으면서도 침착하게 대처했다. 라무스에게 잡힌 손 말고 나머지 한 손을 그의 손목에 슬쩍 갖다 댔다. 동시에 라무스는 손목이 따끔한 것을 무시한 채 다른 손으로 그녀의 후드를 젖히고 얼굴의 두건을 잡아챘다.
그녀는 재미있다는 듯 웃었고, 라무스는 눈을 험악하게 부릅뜬 채 그녀를 놓았다.
“이 맛이야. 과연 드물게 맑고 좋은 피로구나.”
라무스를 찔렀던 핀에 묻은 피를 핥은 여자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루크룸을 돌아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