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했다. 루크룸. 아주 잘했어.”
여자는 후드를 다시 깊이 눌러 쓰며 루크룸을 향해 말했다. 그녀는 창살 너머의 포획물에게 얼굴을 보인 것에 대해서는 별로 개의치 않는 듯했다. 칭찬을 받은 루크룸은 공손하고 겸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아욱토르.”
“확인은 끝났으니 일을 서둘러야겠구나.”
잿빛의 여자가 먼저 출입구를 향해 걷기 시작하자 루크룸과 페레우스가 뒤를 따랐다.
그들이 가고 곧 무투스가 옷과 식사를 들고 왔다. 라무스는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다. 무투스는 다른 날과 달리 말을 시키지 않는 라무스를 곁눈질로 슬쩍 쳐다보았지만 늘 그랬듯 조용히 자리를 떴다.
루크룸이 아욱토르라고 부른 그녀를 라무스는 알아보았다. 그녀가 바로 시스를 납치했던 마가 말리티아였다. 아욱토르라는 호칭도 라무스가 아는 것이었다. 파보르에게서 배웠던, 사람들 사이에서 사라진 지 오래인 옛 말이었다. 한 분야의 권위자나 스승을 부르는 말.
그러니까 루크룸은 말리티아의 제자이거나 부하이고, 둘은 한 패거리인 것이다. 그들은 아바루스 왕에게 쉽게 죽지 않는 싸움 인형과도 같은 테리쿨룸 병사를 제공하고 있다. 더 많은 테리쿨룸을 만들기 위해 특별한 피를 가진 인간을 찾아 소모품처럼 이용하는 것이다.
‘시스를 끌고 가려던 것도 그녀의 피로 테리쿨룸을 만들기 위해서였겠군. 아아, 이런! 시스……. 어쩌지? 말리티아가 카푸에 있고 로스 레갈리스에까지 드나들고 있어. 시스에게 알려줘야 하는데 알릴 방법이 전혀 없어.’
여긴 페로조차 오지 못하는 으슥한 지하였다. 라무스는 식사에는 손도 대지 않은 채 동굴 감옥 안을 초조하게 서성였다.
‘말리티아가 여기 있다면 시스가 안전할 수 있는 곳은 최초 신전밖에 없어. 시스는 거기서 나오면 안 돼. 루크룸이 이미 말리티아에게 시스에 대해 보고했을 거야. 그래도 최초 신전과 대사제는 감히 건드릴 수 없을 테니, 말리티아가 시스를 다시 납치하고자 한다면 루크룸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여기 로스 레갈리스에서 저지를 게 틀림없어.’
라무스는 이 지하 동굴이 로스 레갈리스에 속해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왕의 시종장인 루크룸이 쉽고 빠르게 드나들 수 있으면서 탈출이 불가능한 감옥이 어디일까 생각해 보면 당연한 추론이었다.
‘아바루스 왕도 말리티아의 존재를 알고 있을까?’
혼자 고심한다고 답을 알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여기서 나가야 하는데……. 시스가 내 부탁을 들어줄까?’
심란한 가운데 며칠이 또 지나갔다. 그리고 말리티아와 루크룸이 다시 찾아왔다. 이번에는 몇 명의 친위대 소속 병사도 따라왔다.
“이리 와서 팔을 밖으로 내밀어.”
루크룸이 라무스를 불렀다. 안쪽에 앉아 있던 라무스는 움직이지도 말하지도 않고 가만히 있었다. 말리티아의 손에 들린 은그릇만 노려보면서. 피를 받기 위한 그릇일 터였다.
“협조할 뜻이 없단 말이지?”
비웃음을 띤 루크룸이 병사들에게 고갯짓을 하자 그들 중 둘이 창살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라무스는 차분히 기다리다 날쌔게 움직였다. 병사 하나가 비틀거렸다. 라무스의 손에 숨겨져 있던 주먹만 한 돌이 그의 눈두덩으로 날아갔던 것이다. 다른 병사가 몸을 날려 라무스에게 달려들었다. 라무스는 예상했다는 듯 몸을 굴려 피했다.
두 번째 돌이 날아가 달려들던 병사의 귀 뒤를 타격했다. 충격으로 병사의 한쪽 무릎이 꺾였다. 라무스는 저항할 수 있을 때까지는 저항할 작정이었다.
두 병사는 이내 다시 자세를 가다듬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다. 라무스는 그들이 페리쿨룸임을 알았다. 그렇다고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너희들도 들어가. 저 자를 붙잡아서 끌고 와. 기절시켜도 좋다.”
루크룸이 명령하자 뒤에 남아 있던 병사 셋이 안으로 들어왔다.
다섯이 다 페리쿨룸이었다. 라무스는 피하고 뿌리치고 주먹질하고 발길질했으나 급소를 맞고도 죽지 않는 다섯 페리쿨룸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결국 멍과 핏자국으로 엉망이 된 몰골로 창살 앞으로 질질 끌려가는 신세가 되었다.
“어리석구나. 쯧쯧.”
병사들에게 사지를 압박당한 채 꼼짝없이 끌려온 라무스를 보며 말리티아가 혀를 찼다. 입가의 피를 그녀가 옷소매로 닦으려 하자 라무스는 고개를 돌렸다. 말리티아는 냉소를 흘리면서 병사들에게 라무스의 팔을 자기 쪽으로 내밀라고 지시했다.
라무스는 죽을힘을 다해 버텼지만 역부족이었다. 병사들이 강제로 그의 팔을 말리티아의 은그릇 위에 붙들어 놓았다.
“한 그릇이면 돼.”
말리티아가 아주 작고 날카로운 칼을 꺼냈다. 그때 출입 계단 저 멀리에서 다급하고 신경질적인 외침이 들려왔다.
“루크룸!”
여러 사람이 계단을 내려오는 부산한 발소리가 뒤를 이었다.
“아욱토르. 잠시만요. 저건 왕의 음성입니다.”
루크룸이 말리티아를 저지했다. 말리티아는 작은 칼과 은그릇을 망토 속에 감추고 물러났다. 계단에서 아바루스 왕이 모습을 드러냈다.
“물러서, 루크룸. 내가 저 자를 봐야겠다.”
“예, 전하.”
루크룸과 말리티아와 병사들이 일제히 한쪽으로 비켜섰다. 라무스는 그대로 서 있었다.
“아들이라고 생각하고 보니 닮은 데가 있군. 확실히 유바론의 골격이야.”
아바루스 왕의 말에 루크룸이 깜짝 놀랐다.
“전하. 그 자는 떠돌이 와고르입니다. 레이디 페르비아의 결투 기사였던 그 자 말입니다.”
“알고 있네. 루크룸. 그리고 믿을 만한 소식에 의하면 그 와고르가 아세르의 아들이라는군. 내가 오래도록 찾고 있었던 시데레온의 후계자 말일세.”
불쾌한 기색으로 루크룸을 잠시 노려본 아바루스 왕이 라무스에게 물었다.
“자네가 라무스 유바론이 맞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