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 무서운 것 테리쿨룸

by 화진


여긴 숙사의 방이 아니야. 동굴이야.


축축한 공기, 습한 바위와 흙의 냄새, 물 흘러가는 소리, 조금 먼 벽에서 타고 있는 횃불 같은 것들로 라무스는 자신이 누워 있는 곳을 유추했다. 감옥이었다. 지하 감옥. 냄새가 역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아 오래 비어 있었던 곳이 틀림없었다.


측면의 벽에 갈라진 틈이 있고 거기로 물이 콸콸 떨어졌다. 물은 움푹한 바닥을 따라 어디론가 흘러나갔다. 그곳이 어디인지는 알 수 없었다. 전면 전체가 쇠창살로 가로막혀 있었다. 물은 창살 사이로 유유히 빠져나가지만 라무스는 그럴 수 없었다.


라무스는 벽의 틈에서 떨어지는 물을 받아서 마셨다. 물은 차고 깨끗했고 갈증을 달래 주었다. 적지 않은 양의 물이 흐르는 도랑 하나로 동굴은 고급스러운 감옥이 되었다. 식수와 용변이 해결되니 위생적으로 봤을 때 확실히 그러했다.


차가운 물에 얼굴과 머리를 흠뻑 적시자 정신이 맑아졌다. 라무스는 창살로 다가갔다. 횃불은 창살 바로 바깥의 양쪽 벽에 걸려 있었다. 멀리 앞쪽에 바위를 깎아 놓은 계단이 보였다. 위로 향하는 저 계단이 출입구일 터였다.


라무스는 창살을 당겨 보고, 밀어 보고, 힘껏 차 보았으나 꿈쩍도 하지 않았다. 발에 차인 쇠창살이 내는 소리만 커다랗고 길게 울렸다.


‘아쿠멘의 약이 수상해. 아니 틀림없이 그것 때문이야. 정신을 잃었던 게.’


안쪽으로 돌아가 바닥에 앉은 라무스는 차근차근 기억을 거꾸로 되짚어 나갔다. 아쿠멘의 약, 그 이전에 친위대장 페레우스의 등장, 그 이전에 페레우스에게 전해진 루크룸의 편지.


‘루크룸이야. 나를 가두라고 한 것은.’


루크룸이 진짜로 라무스를 친위대에 넣고자 했다면 미리 페레우스에게 편지를 전할 필요가 없었을 터였다. 더하여 친위대장인 페레우스를 부를 필요도 없었던 것이다. 라무스를 친위대에 넣으라는 편지를 써서 시종에게 주고 라무스를 친위대로 데려가라고 하면 될 일이었다.


‘그 편지 단계에서부터 계획된 게 분명해. 그때부터 이미 나는 루크룸의 죄수였던 거야. 루크룸이 페레우스를 부른 것은 그에게 나를 보이려고 그랬던 거고. 그러니까 내가 루크룸과 페레우스에게 뭔가 의미가 있는 죄수라는 얘기가 되는데.’


그 의미가 어떤 것인지는 짐작하기 힘들었다. 만약 자신의 정체를 눈치챈 거라면, 시데레온의 라무스 유바론임을 알았다면 가두기 전에 먼저 아바루스 왕의 앞으로 데려갔어야 앞뒤가 맞는다. 아바루스 왕은 전설의 피리를 가진 라무스 유바론을 찾고자 혈안이 되어 있으니까.


‘내 정체를 모른다 치고. 떠돌이 기사 와고르 따위가 저들에게 왜 중요하지?’


라무스는 루크룸에 대한 기억을 더 떠올렸다. 그의 집무실에서 보기 전에 그를 만난 건 단 한 번, 투리스 아래의 결투장에서였다. 그때 그가 했던 행동, 말, 표정, 눈빛까지 하나하나 샅샅이 되새기던 라무스는 딱 하나 미심쩍은 점을 짚어냈다.


‘루크룸이 손수건으로 내 피를 닦아 주었어. 그는 그 손수건을 버리지 않고 소매 속에 넣었어. 결투에서 나는 흑주술의 인형 기사 코르푸스를 쓰러트리기 위해서 검에 내 피를 묻혔고. 루크룸이 코르푸스가 흑주술의 인형 기사임을, 검으로는 죽일 수 없는 기사임을 알고 있었다면……. 그도 내 검에 묻은 피가 코르푸스에게 걸려 있는 흑주술을 깼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을 테지.’


어차피 라무스도 친위대에 들어가려는 목적은 따로 있었다. 아바루스 왕과 그의 측근들 그리고 궁정의 형세, 흑주술의 인형 기사 등등에 대해 은밀히 알아보려던 것이었다. 물론 페르비아의 칼끝을 피하는 손쉬운 방법이기도 했고.


이제 기다리는 수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낮인지 밤인지도 모르는 채로 라무스는 하릴없이 앉아 있었다. 졸졸거리는 물소리와 가끔씩 타닥거리며 튀는 횃불의 소리를 들으면서.


횃불이 잦아들어 작아졌을 때 마침내 계단을 내려오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루크룸이었다. 그의 개인 시종이 횃불을 들고 따라와 동굴 벽의 횃불과 바꾸어 놓았다. 루크룸이 창살 가까이에 섰다.


“친위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거라고 하셨잖습니까? 그 중요한 역할이라는 것이 이렇게 갇힌 채로만 할 수 있는 것인가 봅니다?”


“눈치가 빠르군. 네 말이 맞아, 와고르.”


“제 피 때문입니까?”


“생각했던 것보다 더 똑똑하군. 그래, 그 말도 맞았어. 역시 검에 피를 묻혀서 코르푸스를 찌른 건 의도된 행동이었군. 그렇지?”


사이에 창살이 있었고, 갇힌 자와 가둔 자 중 누구도 속내를 숨기지 않았다. 갇힌 자는 저들이 자신을 쉽게 죽이지 않으리라는 계산이 있었고, 가둔 자는 저 귀중한 포획물을 잃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코르푸스라는 기사가 이상했으니까요. 표정도 없고, 고통도 못 느끼고. 그래서 생각했습니다. 흑주술일지도 모른다고.”


“자신의 피가 특별하다는 걸 알고 있었던 모양이지?”


“꼭 그런 건 아닙니다. 가장 강력한 종류의 흑주술에는 피를 쓴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피로써 그걸 깰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싶었던 거죠. 그런데 제 피가 어떻기에 특별하다는 거죠?”


“세상에는 아주 깨끗하고 좋은 피를 가진 인간도 있어. 많지도 않고 찾기도 힘들어서 확보하는 데 애를 먹지만 말이야. 네가 코르푸스를 처치하는 걸 보고 일부러 내 손수건으로 네 피를 닦았지. 혹시나 하고 그 손수건에 시약을 뿌려 보았더니 역시나더군.”


“당신도 마구스입니까?”


예상했던 대로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라무스는 다른 궁금증으로 넘어갔다.


“그런 피를 이용한 흑주술로 코르푸스 같은 죽지 않는 인형 기사를 만드는 겁니까?”


“죽지 않는 인형 기사?”


루크룸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들을 우리는 테리쿨룸이라고 불러. 무서운 것이라는 뜻이지.”


“왕의 친위대 가운데 테리쿨룸은 몇 명이나 됩니까?”


대답 대신 루크룸은 놀리는 표정을 지었다.


“곧 식사와 갈아입을 옷이 올 거야. 쾌적하게 지낼 수 있을 걸세. 그럼, 또 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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