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 라무스의 부탁

by 화진


누가 보낸 것인지는 짐작이 갔다. 페로가 가까이 다가갈 만한 사람은 시스를 제외하면 한 사람뿐이었으니까. 시스는 조금은 미묘한 기분으로 작은 종잇장을 펴 보았다.



님파의 서는 아주 오래된 속임수라는군. 누가, 무슨 목적으로 그랬는지는 알아내지 못했어.

그리고 시스 당신에게 부탁이 있어. 하지만 들어주지 못할 상황이면 무시해도 돼. 절대 부담 갖지 마.

만약에 말이지...



글씨는 힘차고 단정했고, 서명은 없었다. 그러나 예상했던 대로 라무스가 보낸 것이 틀림없었다. 시스가 님파의 서에 대해 정보를 공유했던 단 한 사람이 그였다. 그는 편지의 첫머리를 님파의 서에 대해 자신이 새로 알게 된 사실로 시작했다.


“부담 갖지 말라는 말이 진심인 건 알아. 그런데 나도 모른 척은 못하지. 당신이 내 생명을 한 번 구했잖아.”


중얼거리면서 시스는 종이를 촛불의 불꽃에 가져다 댔다. 화르르 불길이 옮겨 붙은 종이는 금세 검은 재로 변했다. 시스는 재가 종이의 형태를 잃고 흩어지기 직전에 벽난로에 던져 넣었다.


“그리고 나를 이렇게까지 믿는데 어쩌겠어. 그렇게 큰 비밀을 맡길 만큼.”


엄청난 비밀을 밝히는 것으로 끝맺은 편지였다. 시스는 왜 그가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이해했다. 자신이 그였어도 그렇게 했을 것 같았다.


*


친위대장이 오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렸다. 그 사이 루크룸은 책상에 앉아 서류를 보고, 라무스는 창가를 서성이며 바깥으로 펼쳐진 로스 레갈리스의 전경을 여러 각도에서 내다보았다. 로스 레갈리스는 웅장하고 화려하면서 정교하고 복잡한 면이 있었다.


이곳이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길을 잃을 수도 있겠어. 머릿속에다 자신만의 로스 레갈리스 지도를 그려 넣으며 라무스는 생각했다. 지금까지 본 것만으로 그린 머릿속 지도는 아직 빈 데도 많고 불완전했다.


노크 소리가 났다. 친위대장이 온 모양이었다. 라무스는 돌아서서 정자세로 기다렸다. 무사히 친위대 소속의 병사가 된다면 로스 레갈리스의 구조를 훤히 익힐 수 있을 터였다.


“들어오게.”


루크룸이 문을 향해 말하자 크고 다부진 체격의 사내가 들어왔다. 인상이 험악하고 입매가 살짝 비뚠 그가 바로 친위대장 페레우스였다. 페레우스는 루크룸에게 깍듯이 인사하고는 라무스 쪽으로 다가왔다.


왕의 친위대를 이끄는 대장이 고작 시종장에 불과한 자를 받들어 모시는 듯 보이는 어색한 장면을 보며 라무스는 의문을 품었다.


아무래도 루크룸의 실질적인 역할은 단순한 시종장 그 이상인 듯했다. 디위나 할멈도 말했었다. 루크룸과 아바루스 왕이 어려서부터 가까웠다고. 어쩌면 루크룸이야말로 왕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숨은 실세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와고르라고? 성은 뭔가?”


라무스의 앞에 선 페레우스가 물었다. 바로 앞에서 보니 더욱 위압감이 느껴졌다. 페레우스는 키도 라무스보다 더 컸고 어깨도 더 넓었다.


“없다고 해야 할지, 모른다고 해야 할지, 그냥 와고르입니다.”


“아비 없는 자식이란 말이지?”


라무스는 상대가 긍정으로 받아들일 만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뭐 좋아. 그런 건 상관없으니까. 잠깐.”


페레우스가 문으로 가더니 밖에 대기시켰던 자를 안으로 들였다. 루크룸은 지켜만 보았다. 페레우스는 늙수그레하고 마른 사내를 데리고 라무스에게 돌아왔다.


“이쪽은 아쿠멘, 친위대의 수석 약제사다. 와고르, 상의를 벗고 상처를 보여줘 봐. 네가 입은 부상이 어느 정도인지 알아야겠으니.”


라무스는 망설임 없이 윗옷을 벗어 버렸다. 아쿠멘은 어깨에 메고 있던 약상자를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얼굴을 들이밀고 상처를 가까이에서 살피더니 의아한 듯 중얼거렸다.


“코르푸스의 검이 두 번 다 이렇게 가벼운 부상밖에 못 입혔다니…….”


그 말에 저만치 책상에 앉아 있던 루크룸이 오더니 라무스의 부상 부위를 유심히 들여다 보았다.


“오호, 회복도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르고. 디위나 할멈이 남다르게 효험 좋은 약을 만드나 보군.”


루크룸이 유쾌하게 말하자 아쿠멘이 인상을 구겼다.


“그 예언자 할멈이 치료했다고요? 흥. 상처 자체가 얕았으니 이 아쿠멘의 약을 썼으면 벌써 아물기 시작했을 겁니다.”


“그래? 어디, 아쿠멘의 능력을 좀 보자고. 지금이라도 자네 약을 써 보게.”


놀리는 것처럼 빙글빙글 웃으며 루크룸이 지시하자 아쿠멘은 분한 낯빛으로 약 상자를 열어 물처럼 투명한 약이 담긴 작은 유리병을 꺼냈다.


“안심하게. 통증은커녕 아무 느낌도 없이 편안할 테니.”


라무스로서는 거부할 도리가 없었다. 아쿠멘은 조심스럽게 상처에 약을 뿌렸다. 그가 장담한 것처럼 조금도 거북하거나 아프지는 않았다.


“며칠만 쉬면 훈련에 합류할 수 있겠군. 아쿠멘을 따라가게. 친위대원들의 숙사로 데려다 줄 거야.”


상의를 입는 라무스에게 페레우스가 말했다.


“그래, 그래. 우선은 푹 쉬어 두라고.”


루크룸이 이만 가 보라는 손짓을 했다. 라무스는 두 사람에게 인사하고 아쿠멘을 따라갔다.


친위대원들의 숙사는 서쪽에 있었다. 다들 훈련이나 근무로 자리를 비웠는지 건물 전체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이 방이야.”


아쿠멘이 방문을 열어 주었다. 라무스는 좁은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럼 난 이만. 곧 또 보자고, 와고르.”


닫힌 문 너머에서 아쿠멘이 흥얼대는 콧노래가 점점 멀어졌다. 라무스는 습관처럼 창가로 갔다. 덧창을 열자 건물을 둘러싼 가시 철책과 철책 너머의 푸른 숲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리고.


눈을 한 번 깜빡인 정도라고 생각했다. 잠든 기억조차 없었으니까. 그런데 시야에 들어오는 풍경이 너무 달라져 있었다. 라무스는 이마를 세게 누르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머리가 지끈거리고 목이 탔다.


이전 11화161. 시스와 대사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