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감한다는 낯빛으로 대사제가 대꾸했다.
“사치와 파티만으로는 설명이 안 되는 게 사실이야. 그렇다고 페르베아투 평민들의 삶이 전보다 나아진 것도 아니고. 오히려 빈민이 점점 더 늘고 있으니. 궁성 도시인 이곳 카푸조차 겉은 나날이 번지르르해지지만 속은 곪아가고 있어.”
카푸가 화려하고 흥성거리는 모습인 까닭은 귀족들이 왕비의 사치 행태를 모방하기 때문이었다. 왕비의 가구, 장식, 커튼, 보석, 옷 등등은 실로 빠르게 카푸의 유행으로 번지곤 했다. 번화한 거리나 큰길 주변의 저택이나 상점들은 그 유행을 따라 번쩍였다.
그러나 숨어 있는 뒷골목으로 들어서거나 외곽 쪽으로 나가면 더럽고 허름한 오두막이 즐비했다. 거기에 파리한 몸에 퀭한 얼굴을 한 채 하루살이처럼 연명하는 하층민들이 있었다. 아바루스 왕은 도시 정화라는 명목 아래 번화가에 순찰 병사를 풀어 행색이 남루한 걸인과 빈민을 내쫓았다.
이런 실정이다 보니 연명 수단이 구걸뿐인 가장 비참한 사람들은 번화가에 들어가기 위한 깨끗한 옷을 가지고 있었다. 대개 몇 사람이 공동으로 장만하여 돌려 입는 식이었다. 귀족 가나 큰 상점에서 일하는 친척이나 친구에게 얻어 입는 경우는 운이 좋은 축에 속했다. 야밤에 옷을 훔치러 번화가에 갔다가 영영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무슨 꺼림칙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웬투스 고원의 마물들의 폐허에 대한 조사는 아직 결과가 나오지 않았습니까? 말리티아를 쫓는 일은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그 일들에 대해서는 데아 세쿠토들로부터 조만간 보고서를 매단 전서조가 오겠지.”
대사제도 그들의 보고가 생각보다 늦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슬슬 들던 차였다. 기다리는 심정은 아직은 조바심이지만 언제 불안감으로 바뀔지 알 수 없었다. 불안감이 명확해지는 순간 대사제는 능력적으로도 수적으로도 더 보강된 두 번째 정탐 인원을 파견하게 되리라.
“그런데 어째 네 말이 내 귀에는 아바루스 왕이 여신의 뜻과 사람의 정도에서 벗어난 일을 꾸미고 있다는 의미로 들리는구나.”
시스의 말에 숨어 있던 속뜻을 대사제는 거침없이 입에 담았다.
“파혼 결투에 이리투스를 대신해서 코르푸스라는 기사가 나왔습니다. 왕이 자신의 친위대에서 선발했다고 들었는데, 그자가 많이 이상했습니다.”
“이상했다? 맥락상 그 이상함이란 흑주술과 관련이 있어 보였다는 말이겠지? 근거를 댈 수 있느냐?”
“그렇습니다. 제가 말리티아에게 당했던 흑주술이 살아 있는 인형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에 걸리면 말도 표정도 자유로운 움직임도 잃습니다. 흑주술을 건 쪽에서 하라는 말을 하고, 지으라는 표정을 짓고, 시키는 대로 움직입니다. 철저하게 조종당하는 겁니다. 그런데 코르푸스가 그 상태와 비슷해 보였습니다. 직접 당해 본 저는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의 눈동자는 텅 빈 듯했고 눈 주위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표정을 짓지 못하기 때문일 겁니다. 제가 느끼기에 그는 마치 싸워 이기라는 명령에 복종하는 인형 같았습니다.”
이렇게 회상하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끼칠 만큼 불쾌하고 끔찍한 경험이었다. 시스는 저도 모르게 양팔을 번갈아 털어냈다.
“그 기사가 흑주술로 만들어진, 전투를 위한 인형 기사라는 네 의견을 사실이라고 치면, 마가 말리티아가 널 납치하려고 한 이유를 알 것 같구나.”
“저를 끌고 가던 중에 말리티아는 말했습니다. 제가 순연한 피를 가졌다고요.”
“그럴 테지. 순연한 피를 쓸수록 강한 흑주술을 쓸 수 있으니. 순수한 혈통의 마가나 마구스의 피도 강력한 흑주술의 도구가 되지만 요정이나 정령의 피는 그것보다 더 좋은 효과를 낸다고 알고 있다.”
클라비스가 막 대사제가 되었을 때 대사제의 고문서에서 보았던 내용이었다.
“말리티아는 네가 본디 물의 요정임을 알고 있었을까?”
“그런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일부러 저에게서 피를 내어 맛을 봤다고 했으니까요. 맛을 보니 맑고 깨끗하더라고 말입니다.”
“네가 도중에 말리티아로부터 벗어난 건 정말이지 다행한 일이구나.”
“친구들의 도움이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귀린의 아이 케노, 페로, 그리고 라무스. 우리 모두가 한 자리에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시스는 문득 심장이 아릿했다.
“대사제님께 한 가지 난감한 질문을 드려야겠습니다.”
“들어 보자. 날 얼마나 난감하게 만들 수 있는지.”
“만약, 만약에 말입니다. 왕이 말리티아 무리와 결탁했다면, 그런 식으로 새벽의 여신에게서 등을 돌리고 마가, 마구스 들과 한 배를 탄다면, 대사제님과 최초 신전은 여신의 이름으로 왕과 맞서 싸우실 겁니까?”
과연 난감한 질문이었다. 대사제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여신의 사제가 하는 일은 기도와 선행이야. 싸움은 우리에게 허락된 분야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리고 신전이 왕과 맞선다는 건 전례가 없는 일이지.”
실망감이 시스의 눈동자를 어둡고 촉촉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나는 싸울 것이다. 사악한 흑주술은 이 땅에서 없어져야 하니까. 상대가 누구라도 흑주술과 마가와 마구스를 편으로 삼는 이가 있다면 나 클라비스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일이 벌어졌을 제가 대사제님 옆에 설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꼭 그렇게 하겠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시스의 신상에 불확실하고 불안한 요소가 많았다.
“네 바람이 확고하다면 아마 이루어지겠지. 오늘밤은 이만 가서 쉬려무나.”
대사제가 코르푸의 시위 없는 활을 챙겨 주었다. 따뜻한 마음을 함께 건네받은 시스는 자신이 쓰는 방으로 갔다. 방문을 연 시스의 눈에 침대 위에서 블랙 오팔 같은 눈을 또록또록 굴리고 앉은 흰 새가 들어왔다.
“페로. 오, 페로. 내가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넌 모르지?”
와락 안으려던 시스를 페로가 재빠르게 피해 버렸다. 덕분에 시스는 침대에 처박혔다. 그래도 조금도 싫거나 서운하지 않았다.
“편지부터 봐라, 이거지?”
도르르 말린 종이를 물고 있는 부리를 톡 건드리며 시스는 콧잔등에 주름을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