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 시위 없는 활

by 화진


열린 상자 위의 구슬 속에서 희미하고 부드러운 빛이 아지랑이처럼 일렁이다 가라앉았다. 대사제가 조심스레 구슬을 집어 올렸다.


“영혼의 구슬이구나. 이 구슬은 그냥 구슬이 아니다. 구슬 주인의 생전의 마음과 힘이 일부 담겨 있어. 그 힘이 저 상자를 열었지. 자물쇠 없이 잠기는 황동 상자를.”


시스는 보니타에 대해 들려주던 다피넬을 생각했다. 그때 다피넬에게서 느껴지던 자부심과 깊은 슬픔을.


“보니타. 구슬 주인의 이름이지요. 레이디 다피넬의 쌍둥이 언니였다고 합니다. 잘은 모르지만 어린 시절 그녀들에게 무섭고 슬픈 일들이 있었던 듯합니다. 아마 그 일들과 관련하여 보니타를 잃은 것으로 보이고요.”


추측이지만 거의 확실한 거였다. 꿈마녀가 시스에게 말했었다. 다피넬이 온실과 관련된 끔찍하고 슬픈 기억 속으로 끌려들어가는 악몽을 꾼다고. 그 악몽 속에 말리티아와 보니타가 있으리라. 어쩌면 보니타의 마지막 시간이.


대사제는 구슬을 벽감 속 새벽의 여신 조각상 앞에 임시로 두었다. 잠시 동안이라도 여신의 발아래에서 평화롭기를!


마침내 시스가 황동 상자의 뚜껑을 젖혔다. 상자 내부는 두꺼운 금빛 융단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바닥에 고정된 몇 개의 핀이 포르투나 가의 보물을 붙잡고 있었다.


“장난감 같이 작고 예쁜 활이네요.”


넬리사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런데 시위가 없네요?”


이상하다는 듯 넬리사가 덧붙였다.


보통의 활보다는 훨씬 작지만 정교하고 튼튼한 은제 활이었다. 시위가 있다면 화살을 날리기에 손색이 없는. 그런데 넬리사의 말대로 시위가 매여 있지 않았다.


시스는 손을 뻗어 활을 잡았다. 잡는 순간 활대가 진동하는 듯한 느낌이 손에 전해 왔지만 눈으로 보기에는 아무 변화가 없었다. 시스는 고정핀으로부터 활을 꺼냈다. 그리고 정석대로 활을 잡았다.


사실 시스는 활과 친했다. 앙켑세라에게서 배웠다. 두 여자는 활뿐만 아니라 쇠뇌도 퍽 잘 다루었다. 때로는 도둑의 일도 했던 두 사람에게 활과 쇠뇌는 없어서는 안 될 유용한 도구들이었다.


없는 시위를 당기는 척하려던 시스가 흠칫 놀라더니 손을 내렸다. 잠깐 시위가 있어야 할 자리를 빤히 보던 그녀가 다시 활을 제대로 들고 시위를 당겼다. 그러더니 황당한 말을 했다.


“시위가 있어요. 눈으로는 볼 수 없는데, 손에는 잡혀요.”


자신도 믿기지 않는다는 말투였다.


“정말이에요?”


묻는 넬리사에게 시스가 활을 내밀었다. 넬리사는 방금 시스가 취했던 활쏘기 자세를 따라했다. 어설퍼서 귀여워 보였다.


“없는데요?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다고요.”


시위가 있을 자리를 몇 번이고 손으로 더듬던 넬리사가 허탈한 웃음을 띠었다.


“아, 알 것 같아요. 이래서 레이디 다피넬께서 이것을 꼭 레이디 시스가 손으로 만져 보게 하라고 당부하셨던 거예요. 시위 없는 활이 선택하는 거였어요. 자신을 가질 자격 있는 주인을요.”


대사제가 말없이 끄덕여 넬리사의 말을 긍정했다.


“넬리사. 이제 어쩔 거예요? 레이디 다피넬을 돕느라 데세르 공작의 눈 밖에 났으니 타키툼으로 돌아갈 순 없잖아요.”


활을 내려놓은 시스가 염려가 서린 눈으로 넬리사를 보았다.


“다행히 부모님께서 여기 카푸에 와 계세요. 아버지께서 이번에 자작의 작위를 받게 되셨거든요. 아니, 그냥 솔직히 말할래요. 자작 작위를 사셨어요. 그 대가로 타키툼의 와인 사업과 엄청난 재물을 왕께 바쳤다나 봐요.”


얼마간 부끄러워하면서도 넬리사는 거침없이 털어놓았다.


“일단 부모님께 가면 돼요. 가서 오티움에 보내달라고 떼를 써 보려고요. 아버지는 반대하실 게 뻔하지만 어머니를 설득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 그럼 아버지께서 의절을 선언하셔도 어머니께서 도와주실 테죠. 불행하게도 어머니마저 끝까지 반대하시면 몰래 도망치는 수밖에요.”


넬리사는 결연했다.


“오티움은 정말 좋은 곳이에요. 넬리사가 오랜 꿈을 꼭 이룰 수 있기를 바랄게요. 우린 어쩌면 나중에 오티움에서 재회할지도 모르겠네요.”


우리에게 운이 따른다면. 내가 살아남는다면. 시스가 넬리사의 손을 잡았다.


“넬리사의 곁에 여신 아우로라의 빛이 늘 함께 하기를 빌어요.”


“고마워요. 레이디 시스에게도 여신의 가호가 있기를.”


“넬리사 켄트. 저 데아 세쿠토에게 부모님 계신 곳을 말하면 이곳의 마차로 데려다 줄 거다. 수고 많았다. 여신의 이름으로 널 축복하마.”


대사제의 말에 넬리사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부모님께 자랑해도 되죠? 최초 신전에도 들어와 보고, 대사제님께 직접 축복도 받았고, 최초 신전의 마차를 타고 왔다고 말이에요.”


“물론이다. 그런데 데아 세쿠토에 대해서는…….”


넬리사가 알겠다는 얼굴로 말을 받았다.


“그럼요. 데아 세쿠토를 만났다는 말은 뺄게요. 클레멘스 사제님께서 가르쳐 주셨어요. 데아 세쿠토의 도움을 받았다는 걸 함부로 떠벌리지 않는 것이 곧 그들에게 감사하는 태도라고요.”


데아 세쿠토와 넬리사가 나가자 시스는 다시 활을 들어 보더니 대사제에게 내밀었다.


“굳이 시험해 볼 필요 없다. 그 시위는 나에게 만져지지 않을 테니까. 코르누의 시위 없는 활은 이미 자신의 그리고 코르누의 다음 주인을 선택했으니 말이다.”


“어쨌거나 쏠 수 있는 화살은 없는 활이군요. 그나저나 이제 제가 이 활을 지니고 다녀야 할 테니 무거운 황동 상자에는 담을 수 없습니다. 상자와 구슬은 대사제님께서 맡아 주십시오.”


“그래, 그러자.”


“대사제님.”


시스가 심각하게 불렀다.


“아바루스 왕이 재물에 혈안이 되어 있는 것이 아무래도 심상찮습니다. 왕비의 사치만으로는 설명이 안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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