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을 사겠다는 소현의 뜻을 처음엔 사양했지만 끝끝내 뿌리치는 것도 예의가 아닌 듯해서 결국 문비는 그녀를 따라 복지관 옆 건물에 있는 백반집으로 갔다. 선배님과도 종종 오던 식당이라고, 선배님은 주로 순두부찌개를 드셨다고 소현이 회상했다.
순두부찌개를 먹고 나와 복지관 주차장에서 소현과 작별했다. 엄마를 대신하여 점역 봉사를 할 생각이 없느냐는 소현의 말에 문비는 생각해 보겠다고 대답했다. 고려해 본 적이 없는 일도 아닌데 막상 제안을 받으니 망설여졌다. 스스로에게도 뜻밖의 반응이었다.
여전히 비는 주룩주룩 내렸다. 빗속을 운전하는 건 내키지 않았지만 돌아갈 곳이 있다는, 그곳으로 가고 있다는 기분이 힘이 됐다. 문비는 몸과 함께 다니는 마음보다 더 커다란 마음이 남아 있는 곳을 향해 신중하게 차를 달렸다.
*
“뭐…… 마음에 걸리는 일이라도 있어? 작업이 잘 안 돼?”
점심으로 호박잎과 감자를 넣어 끓인 수제비를 먹다가 은성이 물었다.
“아니. 왜?”
라한의 대답에 은성이 아슴푸레한 웃음기를 띠었다.
“그냥 왠지 좀 그래 보여서. 아님 다행이고.”
짚이는 데가 없지 않았다. 은성은 라한이 안쓰럽기보다 부러웠다. 지금 라한은 자신과 마주 앉아 있지만 또한 전혀 다른 세계에 속해 있는 거라고, 은성은 생각했다. 은성이 아직 알지 못하는 세계.
“누나 전화 오는데?”
거실에서 나는 휴대전화 벨소리를 일부러 무시하던 은성에게 라한이 일깨웠다. 특정 번호 하나에만 적용해 놓은 벨소리였기에 은성은 전화를 건 상대가 누구인지 알았다. 그러나 라한은 알 리 없었다.
길게 울리다 멎었던 벨소리가 이내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아이처럼 입술을 앙다물고 고민하던 은성이 큰 한숨을 내쉬면서 전화를 받으러 가는 걸 보고서야 라한은 전화의 발신자를 추측할 수 있었다. 할머니를 통해 선을 본 그 남자일 것이다.
라한의 귀에 은성이 통화하는 소리가 간간이 들렸다. 은성은 네 혹은 아니오 하고 단답형의 대답만 수동적으로 했다. 평소와 달리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를 듣다가 라한은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 사람.”
식탁으로 돌아온 은성이 씁쓸하게 웃음 지었다.
“누나. 정말 아닌 것 같으면 아니라고 할머니께…….”
은성의 도리질이 라한의 말을 잘랐다.
“시간을 좀 벌었으니까 그동안 열심히 생각해 보려고 해.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으니까.”
선을 본 그 남자는 인도로 장기 출장을 가 있는 상태였다. 은성이 벌었다는 시간은 곧 출장 기간을 의미했다. 은성이 여기 와 지낼 수 있는 것도 그 출장 덕분이었다.
그런 일은 생각으로 하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하는 거라고, 라한은 대답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그걸 모를 은성이 아니었으므로.
“장마라더니 비가 그치질 않네. 문비씨는 오늘 돌아오려나 어쩌려나.”
은성이 지나가는 말로 중얼거렸다.
넓은 창에 부딪쳐 투명하게 뭉개지는 빗줄을 보는 라한의 얼굴에 염려의 빛이 드리웠다. 오늘 문비가 돌아오기를 바라마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가 빗물 흥건한 고속도로를 운전하는 건 싫었다.
오후 작업을 하는 동안 라한은 작업실에 라디오를 틀어 놓았다. 채널은 혹여 문비가 거쳐 올지도 모를 고속도로의 상황을 시간대별로 알려주는 교통방송이었다.
바이올린 뒤판의 두께 작업이 거의 마무리 단계였다. 둥근 끌의 자국을 자그마한 손대패로 평탄하게 만드는 동안에는 라한의 귀에 라디오 소리는 들어오지 않았다. 그의 정신과 육체의 모든 주파수가 단풍나무와 손대패와 두께에 맞춰져 있는 탓이었다.
두께 작업은 소리의 울림에 아주 중요한 과정이었다. 미세한 오차도 허용해서는 안 되는 만큼 숙련도와 집중력을 최대치로 발휘해야 했다.
손대패를 쓰는 공정이 끝나고 숨을 고르는 잠깐 동안 귀 기울여 듣던 라디오 소리는 라한이 스크레이퍼를 드는 순간 다시 사라졌다. 스크레이퍼로 거친 면을 매끈하게 가다듬던 라한이 손을 멈춘 건 깨금이가 옆에 와 낑낑거리는 소리를 냈기 때문이었다.
라한이 돌아보자 깨금이가 창가로 가서 밖을 향해 작게 컹 짖었다.
비가 그친 듯했다. 창을 가득 채웠던 물빛 빗금무늬는 보이지 않고 암녹색으로 젖은 산과 숲의 풍경이 함초롬 드러났다. 하늘 가득 뻑뻑한 비구름은 그대로인 걸 보니 날이 개는 건 아니고 얼마간 소강상태를 보일 모양이었다.
“깨금이, 산책 나가고 싶구나?”
라한은 깨금이와 함께 본채로 갔다. 이미 은성이 깨금과 산책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깨금이 산책은 내가 데리고 나갈게. 넌 이 틈에 달리기를 해.”
분홍색 비옷을 입은 은성이 깨금에게 목줄과 리드줄을 채워 밖으로 나갔다. 종일 시무룩해 있던 깨금이는 신이 나서 금빛 꼬리와 엉덩이를 설렁거리며 앞장섰다.
라한도 발수 기능이 있는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고 집을 나섰다. 경사진 임도를 한참 달리고 돌아오는 길, 저기 언덕을 올라오는 하얀 차가 보였다. 다리는 멈췄는데 심박수는 치솟았다. 문비의 차였다.
하얀 차는 늘 서 있던 그 자리에 섰다. 올리브그린의 원피스를 입은 문비가 차에서 내리자마자 곧장 라한에게로 걸어왔다. 바로 앞까지 온 문비가 말없이 라한을 올려다봤다. 지친 기색의 그녀를 라한이 가만하게 응시하다 으늑하게 말했다.
“왔어요?”
마주 선 채로 문비가 라한의 왼쪽 어깨에 앞이마를 기댔다.
“잠시만 이렇게 있을 게요.”
문비의 등이 가늘게 들썩였다. 이상하게도 그를 보는 순간 피로하고 서러웠다. 혼자 참거나 억눌러 왔던 저간의 감정들이 북받친 것이다.
서늘한 이마를 받쳐주는 어깨가 굳건하고 다스워서.
바보같이 기어코 눈물이 솟고 말았다.
전선성강우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