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 떨군 자리

by 화진


라한은 슬펐다. 문비가 눈물을 흘려서.


손을 들어 그녀의 둥근 뒤통수를 가만가만 보듬으면서 라한은 행복했다. 문비가 눈물 떨군 자리가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의 심장 위라서.


두 사람을 둘러싼 산등성이에 안개는 피어오르고, 무슨 징조 같은 것이 라한의 늑골 사이 어디쯤에서 슴벅거렸다.


비 내음을 묻히고 날아든 이 여자로 하여 어쩌면 나는 많이 울게 될지 모르겠구나. 이 여자가 주는 울음조차 행복해서 나는 온 생을 다해 이 여자를 놓지 못하겠구나. 오늘 이 여자의 눈물이 적신 내 심장이 영영 마르지 않겠구나.


구름 위에 칼금으로 갈라지는 섬광처럼, 라한의 마음에 이제껏 세상에 존재한 적 없는 지도 하나가 새겨졌다. 단 한 사람만을 향하는, 단 한 사람만이 길잡이가 될 수 있는. 새봄 첫 한 잎의 잎맥 같은.


문비는 눈물이 맺혀 떨어질 때마다 숨 쉬기가 편해지는 걸 느꼈다. 물살에 씻기어 동글어지는 물돌처럼 슬픔과 응어리가 조금씩 씻기어 완만해져 가는 듯했다.


하늘 가장자리 어디쯤에서 먹장구름 뒤채는 소리가 나고 안개비가 떠다니기 시작했다. 미세한 빗방울들은 아스라한 빛을 실어 흩날리고 마음과 마음은 청미래덩굴의 연둣빛으로 산들거렸다.


빗방울이 조금씩 커졌다. 이윽고 문비가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얼굴을 숙이고 손등으로 눈물자국을 훔쳤다. 안 그래도 되는 줄은 알지만 어쩔 수 없이 좀 겸연쩍다.


“괜찮은 거죠?”


조금은 딴청 부리는 표정으로 문비가 조용히 끄덕였다.


“내가 문비씨한테 부탁 하나 해도 돼요?”


머리를 쓸어 넘기던 문비가 다시 끄덕였다.


“앞으론 말없이 어디 가 버리지 말아요. 가까운 곳이든 먼 곳이든, 절대로. 네?”


“어려운 것도 아니네요. 뭘 그렇게 심각해요?”


“그럼, 약속하는 거죠?”


여전히 심각한 그의 눈빛 때문일까. 문득 문비의 가슴속으로 한 줄기 아릿한 통증 같은 것이 지나갔다.


“약속할게요.”


라한의 산뜻한 눈매가 뭉긋하게 휘었다.


*


별장에 들어오자마자 거실 소파에 등을 기대어 앉았던 문비는 깜빡 졸다 머리가 옆으로 툭 떨어지는 바람에 화들짝 눈을 떴다.


사방은 어둑하고 빗소리는 여전했다. 거실 등을 켜고, 일박이일 간의 외출에서 나온 많지 않은 짐을 정리했다. 이것저것 제 자리를 찾아 주고 나니 들고 나갔던 가방 하나가 남았다. 지갑과 휴대전화를 비롯한 잡다한 것들을 꺼내 탁자에 올려놓고 나니 가방에는 가죽 표지의 점자 악보 노트만이 남았다.


노트를 꺼내서 이리저리 뒤적여 본다. 아무리 봐도 이름 같은 건 눈에 띄지 않았다. 특징적인 건 표지에 음각으로 찍힌 문양뿐이다. 앞표지에도 뒤표지에도 똑같이 찍혀 있는 문양은 눈(雪)결정 두 개의 가장자리가 살짝 겹쳐 있는 형태였다.


섬세하고 아름다운 음각 문양을 손끝으로 만져 보면서 문비는 자신의 이름을 생각했다. 무늬 문紋, 눈 펄펄 내릴 비霏. 어쩌면 악보 노트를 사용했던 이도 하얀 눈과 관련된 이름을 지녔을지도 모른다고 추측해 본다.


눈과 관련된 이름을 가졌던 누군가는 이 점자 악보로 뭘 했을까? 노래를 불렀을까? 피아노를 쳤을까? 팬플루트나 하모니카 같은 걸 불었을지도 모르지.


뻗어나가던 상상은 현관문 두드리는 소리에 끊어졌다.


“누구세요?”


문을 여니 분홍 우산을 쓰고 비닐 쇼핑백을 든 은성이 동그랗게 웃었다.


“닭죽이 잘 쒀졌기에 좀 가져 왔어.”


“어머, 고마워요. 어서 들어오세요.”


문비는 닭죽이 담긴 자그마한 냄비가 든 쇼핑백을 받아 주방에 가져다 두고 탄산수에 알로에청을 타서 만든 에이드를 내왔다. 어제 채선이모가 챙겨준 알로에청이었다.


“닭죽이 다 되자마자 문비씨 생각이 나는 거야. 가뜩이나 먼 길 오느라 피곤했을 텐데 혼자 끼니 챙기기 귀찮을 것 같아서.”


“지금 제 눈에 언니가 천사로 보여요. 근데 저만 자꾸 얻어먹어서 어쩌죠?”


“마음 쓸 것 없어. 음식이 아니다 뿐이지 보이게 또 보이지 않게 나도 문비씨한테 받는 것 많아.”


“아, 맞다. 저도 드릴 거 있었네요. 잠깐이요.”


기분 좋게 말한 문비가 서재방으로 갔다가 주방을 거쳐 다시 돌아왔다.


“우선 이거요.”


인우가 보낸 허브솔트였다. 문비가 가지고 있으면 무용지물이지만 은성의 손에서라면 분명 마법의 가루가 될 것이다.


“허블솔트? 예쁘다. 향도 너무 좋고.”


하나하나 뚜껑을 열어 본 은성의 눈이 반짝거렸다. 은성은 아기자기하고 예쁜 것들이 좋았다.


“그리고 이것도요.”


문비가 종이 가방을 내밀었다.


“우와 우와아. 이거 진짜 구하기 힘든 건데?”


은성은 아이처럼 환호했다. 전에 은성이 스쳐가듯 수집욕을 드러냈던 옛날 만화잡지였다. 은성이 좋아하는 만화가의 데뷔작 단편이 실린, 오래 전에 발행된 순정만화잡지.


몹시 희귀한 거라 이번에 문비가 헌책방에서 그 책을 만난 건 신기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냥 물어나 보자는 심정으로 말 꺼냈다가 그 책이 진짜 있어서 문비도 깜짝 놀랐었다. 발행된 지가 20년도 넘은 건데 보존상태도 신기할 정도로 양호했다.


“구하기 힘든 거라서 가격도 꽤 나갈 텐데. 이건 책값 내고 받을게.”


“아니에요. 단골 헌책방이 있는데 거기 주인 할아버지께서 괴짜 기질이 있으셔서 특별히 저렴하게 주셨어요. 정말이에요. 정말. 그냥 받으셔도 돼요.”


“정……말?”


“정말이라니까요. 나중에 언제 저랑 같이 그 헌책방 가서 할아버지께 확인해 보셔도 좋아요.”


“그럼 문비씨 말 믿고 그냥 받는다?”


은성은 기뻤다. 귀한 책을 받아서가 아니라 문비와 자신이 우정을 나누고 있음이, 그러니까 드디어 자신에게도 친구라고 부를 누군가가 생겼다는 사실이 기쁜 것이었다.


이전 14화전선성 강우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