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노트

by 화진


내 집, 내 침대에서 문비는 쉬이 잠들지 못하고 뒤척였다. 얕게 내려앉았다 이내 흩어지는 겉잠 언저리의 어지러운 꿈에 가위 눌리기도 했다. 가장 편안하고 안전했던 곳에서 맞닥뜨린 낯선 불안에 문비는 무엇보다 서글픔이 컸다. 불안의 원인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엄마가 이 집에 없다는 것, 죽고 없다는 것.


새벽녘이 되어서야 잠다운 잠에 까무룩 빠졌던 문비가 깬 건 여덟 시가 가까워서였다. 갑갑해서 열어 뒀던 창틈으로 습기와 빗방울이 들어와 방 안 공기가 눅진했다. 비의 기세는 과격하다 할 만큼 세찼다. 창으로 보이는 거라곤 희뿌연 빗줄기의 연속뿐이었다.


운전하고 다닐 일이 걱정이었다. 필요해서 하고는 있지만 문비는 워낙 운전하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하물며 빗길 운전이라니. 한숨이 절로 쉬어졌다. 다행히 집을 나설 때쯤엔 빗발이 조금 약해져 장대비는 겨우 면했다.


“뭘 이렇게 또 바리바리 사 왔대. 잘 지냈지?”


건물 입구에서 기다리던 소현이 문비가 차에서 내릴 때 우산을 받쳐 줬다. 문비가 들고 내리는 종이 쇼핑백들도 나눠 들었다. 근처 빵집의 빵을 거의 반은 쓸어오다시피 한 건, 엄마가 늘 해오던 일이기 때문이다.


“빵이요. 다 같이 드시라고요. 그간 안녕하셨죠? 진작 찾아뵙고 인사 드렸어야 했는데…….”


“너무 그럴 것 없어. 이렇게 왔잖아?”


우산 아래에서 대강의 인사를 주고받았다.


3층으로 올라가던 도중 계단을 내려오는 시각장애인과 마주쳤다. 십대 후반 정도의 나이로 보이는 그 여성은 시각장애인 안내견을 동반하고 있었다. 개를 무서워하는 문비를 소현이 자신의 뒤로 숨기고 섰다.


“서연이 집에 가니? 아직 비가 많이 오는데?”


익숙한 목소리를 만난 서연은 먼눈을 휘어 웃었다. 밝고 단단한 웃음, 자기 삶에 당당한 사람의 웃음이었다. 문비는 잠시 느꼈던 불필요하고 주제넘은 동정심을 마음의 지우개로 쓱쓱 지워 버렸다.


“엄마가 차로 데리러 오신댔어요. 내려가서 빗소리 좀 듣다 봄 금방 오실 거예요.”


순하고 영리한 인상의 개는 자기 임무에만 충실했다. 소현과 문비에게 일말의 관심이나 동요도 보이지 않고 능숙하고 의젓하게, 일정한 속도로 서연을 안내해 계단을 내려갔다.


저렇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훈련과 연습의 시간을 거쳐 왔을까. 짠하게 헤아리며 문비는 지나가는 안내견을 찬찬히 바라봤다. 깨금이와 많이 닮은 골든리트리버여서 그런지 예전만큼 겁이 나지 않았다.


깨금이, 비가 와서 바깥에서 못 놀고 집 안이나 처마 아래에서 시간을 보내겠구나.


떠올리자 그리워진다. 깨금이도, 사람들도. 여기 대도시에 비하면 가히 도원경이라 할 수 있을 여름 숲도. 어느 결에 거기에 이처럼 커다랗게 마음이 기울었던가. 이제 그리운 것들은 그 숲에 더 많은 것 같다.


“이거, 맘에 드실지 모르겠어요.”


사무실에 마주 앉고 나서 문비가 색지로 포장한 사각 꾸러미를 내밀었다.


“뭘까?”


기대하는 얼굴로 소현이 포장을 풀었다.


“예쁘다. 아주 좋다. 저쪽 벽이 좀 허전했는데 이걸 걸면 딱이겠어.”


블루베리의 꽃과 열매 그리고 잎과 가지를 그린 생태화를 표구한 것이었다. 소현은 크게 기뻐했다. 문비가 그림 선물을 잘 하지 않는다는 걸 정인에게 들어 알고 있었다.


“고마워. 잘 간직할게.”


“저야말로 많이 감사했어요.”


“아니야. 나야말로 선배님한테 감사한 일이 많았지. 선배님만큼 든든한 봉사자이자 후원자는 내가 이 일 하는 동안 다시 못 만날 거야.”


소현은 정인이 나온 대학의 동문이면서 봉사 동아리 후배이기도 했다. 비록 학번의 간격은 거의 이십 년에 가까웠지만 두 사람은 그런 연을 매개로 돈독히 지냈다. 소현은 정인을 선배님이라고, 정인은 소현을 김선생이라고 불렀다.


“저어, 이것 좀 봐주세요.”


문비가 가방에서 차분한 초록색의 가죽 장정이 된 두꺼운 노트를 꺼냈다. 어제 엄마 책상 서랍에서 나온 것들 중 유일하게 문비의 호기심을 자아낸 물건이었다. 상태가 깨끗하긴 하지만 완전히 새것 같지는 않았다.


“점자용 책이나 노트일 텐데 내용에 쓰인 점자가 낯설어서요. 한글도 아니고 숫자도 아니고 수학 기호도 아니고.”


“어디 보자, 악보네. 점자 악보.”


“악보요? 아아, 상단의 한글 점자가 노래 제목이었구나.”


어젯밤 봤던 몇 개의 제목을 떠올리며 문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네, 남촌, 보리밭…… 같은 서정적인 제목들. 어쩐지 낯익은 느낌이더라니.


“요즘엔 쓰리디프린터로 일반 악보를 그대로 입체 프린팅해서 시각장애인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기도 해. 장차 입체 프린팅 악보가 상용화되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을까 싶은 게 내 생각이야.”


점자 악보는 꽤 복잡하다. 익혀서 익숙해지기가 만만치 않다. 일반 악보를 입체 프린팅한 쪽이 익히기도 더 수월하고 읽는 것도 빠르다고 한다.


“네에…… 저 그런데…… 이 악보는 지금 처음 보시는 거죠?”


“그렇지. 난 선배님이 점자 악보까지 하시는 줄도 몰랐는데? 선배님이 하신 게 확실하긴 한 거야?”


“그건 저도 모르겠어요. 엄마 책상 서랍에서 나오긴 했지만요.”


문비도 엄마에게서 점자 악보 얘기를 들은 기억은 없었다.


“보아하니 최근에 만든 건 아닌 듯한데. 나 부임하기 전에 계셨던 전임자분께 의뢰받았던 건지도 모르지. 예컨대 악보를 제대로 옮겼나 봐 달라는 의뢰 같은 것 말이야. 근데 이 노트 굉장히 공들인 수제품인가 보다. 가죽 장정 색감이랑 디자인 고급스러운 것 좀 봐.”


점자 악보 노트를 돌려주며 소현이 감탄했다.


“그러게요.”


“다시 생각해 보니 누군가가 자기가 쓰던 악보를 기념으로 드렸다거나 그랬을 수도 있겠다. 선배님은 아주 오랫동안 점역 봉사를 해오셨으니까.”


“네, 그럴 지도요.”


처음 발견했을 때부터 어쩐지 사적인 물건이라는 느낌이 들긴 했었다. 문비는 노트를 도로 가방에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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