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없는 집

by 화진


점심을 먹고 나와 깨금이와 잠깐 집 옆 개울가를 거닐 때. 에프홀 내는 작업을 끝내고 휴식을 취하면서 건넛집 방향으로 난 창에서 시선을 거두지 못하는 동안. 당혹과 초조로 어룽진 마음의 공백만 자꾸 커져갔다.


저물녘 깨금이와 산책을 나서고서야 라한은 공터에 주차돼 있던 문비의 차가 없어진 걸 발견했다. 어디 먼 길을 갔나 보구나, 생각하는 순간 마음 속 공백이 덜컥 그를 집어삼켰다. 라한은 주위를 가득 떠다니던 비눗방울들이 일시에 펑 하고 터져 사라지는 걸 본 아이처럼 공허해졌다.


고작 하루 만에 이럴 수 있다니. 이렇게 한 사람의 존재가 아쉽고 애틋할 수가. 이렇게 그립고 허전할 수가.

이제야 떠오르는 사실이 있었다. 문비의 전화번호도 모른다는 것. 아직껏 그걸 물어 놓지 않은 스스로를 멍청하다 원망했다.


돌아올 텐데, 여기에서 해야 할 일이 있다 했으니 필시 돌아올 텐데. 일상적인 부재일 텐데. 이토록 초조하고 두려운 스스로가 라한은 이해되지 않았다.


이날 이때껏 그 누구에게서도 받아본 적 없는 종류의 시푸른 외로움이 모시 수건에 풀물 배듯 가슴으로 스며들었다. 막 듣기 시작한 빗방울과 함께 어스름이 젖어드는 외줄기 도로를 라한은 하염없이 지키고 서 있었다.


*


세진과 헤어진 문비는 채선 이모네로 갔다. 아까부터 이제나저제나 기다리던 채선 이모와 일찍 퇴근해 들어온 남 교수까지 셋이 모여 저녁을 먹었다.


예전에 가끔 놀러 와 저녁을 먹고 가곤 하던 그때처럼 자연스러웠지만 누구도 정인에 대해 입에 올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셋 모두가 서글픈 결핍감을 느꼈다. 그리고 그걸 서로 애써 감추는 저녁 식탁이었다.


저녁을 먹은 다음에는 남 교수의 서재로 자리를 옮겨 그동안 그린 그림들을 함께 보며 말하자면 컨셉트 회의를 했다. 남 교수는 문비가 그린 그림들에 흡족함을 표했다. 앞으로 그려야 할 식물들의 꽃이나 과실에 얽힌 추억담들도 들려줬다.


“산문집인지 에세이인지는 정말 내시는 거예요?”


벼르고 별렀던 질문을 하는 문비에게 남 교수는 억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어허. 출간 계약서라도 보여 주랴?”


“아뇨. 계약서는 됐고요 원고를 보고 싶어요. 계약하셨으면 쓰고 계실 거 아니에요?”


“쓰고야 있지. 그런데 누굴 보이자니 이거 쑥스러워서.”


“수필로 등단도 하셨다면서요. 그리고 남한테 보이는 거 쑥스러워하시면 책은 어떻게 내시게요? 아무래도 제 입장에선 원고의 분위기를 보면 그림 그릴 때 구도라든가 여러 가지 결정하기가 쉬워질 것 같아서요.”


팔짱을 낀 채 갈등하는 남 교수를 문비가 부추겼다.


“제가 무조건 너무 좋다고, 너무 잘 쓰신다고, 힘 팍팍 드릴게요. 저는 그렇던데요. 그림으로 칭찬 받으면 힘이 나면서 오히려 제 그림의 부족한 점이 뭐가 있을까 더 돌아보게 되고요.”


“혼자 하는 창작이라는 게 그런 점이 있긴 있지. 알았다. 이메일로 보내 놓으마.”


남 교수도 아주 보여주기 싫은 눈치는 아니었다.


밤도 깊어가고 비도 내리니 여기서 묵어가라는 채선 이모와 남 교수의 권유를 기어이 물리치고 문비는 집으로 향했다.


엄마가 없는 집에 처음으로 발을 들이는 거라 현관문 앞에서는 잠시 복잡한 감정에 빠졌다. 심장이 빠르게 박동했다. 문을 열면 엄마가 ‘왔니?’ 하며 반겨줄 것 같으면서도 그럴 리 없다는 자명한 현실이 지각됐다. 몇 달에 걸쳐 차곡차곡 쌓였을 정적이 무섭기도 했다.


막상 들어가 불을 켜고 보니 집은 비어 있던 집 같지 않게 깨끗하고 정돈이 잘 돼 있었다. 별 말은 없었지만 채선이모가 한 번씩 들러 건사하는 덕분일 것이다.


문비는 거실 바닥에 무릎을 안고 앉았다. 한참을 우두커니 앉았다가 일어나서 엄마 방으로 갔다. 침대 옆 협탁에 놓인 사진 속에서 학사모 쓴 문비와 엄마가 나란히 웃고 있다. 문비는 그 사진을 찍은 날이 아주 먼 옛날처럼, 마치 전생처럼 느껴진다.


서재방을 그림 작업하는 문비에게 내어준 엄마는 침실에 책상을 들여놓고 화장대로도 쓰고 책상 본연의 용도로도 썼다. 한 번도 뒤져 본 일 없는 엄마의 책상 서랍을 문비는 차례차례 열고 안에 든 것들을 꺼내 봤다.


별다른 건 나오지 않았다. 점자일람표와 점지, 점필, 점관도 문비에게는 이상한 물건이 아니다. 문비의 엄마 정인의 직업은 여성복 매장 점주였지만 그녀가 일 못지않게 열심히 했던 게 바로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점역봉사였다. 요즘은 점역도 컴퓨터로 거의 하지만 정인은 아주 가끔 수작업도 했다.


점역봉사를 하는 엄마를 보고 자라는 동안 문비도 자연스럽게 점자를 익혔다. 엄마가 아프기 시작하고부터는 가끔 점역이나 점역교정 봉사 일을 돕기도 했었다.


명함철의 명함들을 살피다가 문비는 점자가 함께 들어가 있는 명함을 꺼냈다.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시각장애인 도서관 소속의 사회복지사 김소현이 명함의 주인이었다. 엄마와는 십년지기 지인으로 엄마는 그녀를 통해 점역봉사 활동을 해왔다.


김소현 복지사는 채선이모와 함께 아픈 엄마를 돌보는 일을 많이 나누고 거들어 준 고마운 사람이기도 했다. 엄마를 잣나무 아래에 묻고 돌아온 이래로 아직 그녀에게 감사 인사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걸 문비는 문득 깨닫는다. 내친 김에 내일 들렀다 가기로 마음먹었다.


창으로 들이쳐 흘러내리는 빗물이 점차 굵어졌다. 장맛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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