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속도 모르고

by 화진


“아 참, 인우가 허브솔트 보냈는데 색깔들 되게 곱더라.”


당연히 세진에게도 보냈으려니 하고 문비가 말을 꺼냈다.


“뭐 인우놈이? 너한테만 보냈다 이거지? 이러니 내가 인우놈을 인우놈이라고 안 부르게 생겼어? 옛날부터 은근 차별했다니까.”


불공평하다며 세진은 씩씩거렸다.


“이번에 나오면 가만 두지 않겠어.”


주먹을 가다듬는 시늉을 하는 세진에게 문비가 물었다.


“나온대?”


“여름 안에 한 번 다녀갈 거라던데?”


이번에는 문비가 짐짓 서운한 기색을 띠었다.


“인우놈이 인우놈 맞네. 나한텐 여름에 나온단 말 없더니, 너한테만 말했다 이거지?”


“야, 됐다 됐어. 그거야 인우놈이 문비 너한테 서프라이즈 쇼를 하고 싶어 그런 거겠지. 허브솔트 건하고는 차원이 달라.”


여전히 세진인 세진을 보면서 문비는 삶의 계속성을 깨닫는다. 살아 있어서 살아지는, 보이지 않는 멍울로 내맺히는 슬픔의 모서리에 마음자리가 배기는 일조차 차츰 익숙해지는. 그렇게 한 사람의 삶을 견인하는, 한결같은 내 사람들 그리고 생활의 힘.


“나, 실은 그 사초과 아니 현민씨, 사귀기로 했어.”


털어놓는 세진의 뺨이 와인 때문인지 현민 때문인지 발그레했다. 세진은 이 레스토랑의 오너 셰프인 찬민이 현민의 사촌이라는 사실도 고백했다.


본래 오늘은 레스토랑의 휴일이라고, 하지만 찬민은 새 메뉴 개발을 위해 혼자 나와 요리 연습을 하고 있었다고. 공은 공, 사는 사인 만큼 식사 값 계산은 확실히 하겠다고 했고, 대신 지인 할인을 받기로 했다고.


“현민씨가 직장 동료들이랑 밴드를 하고 있었더라고. 몇 주 전이던가 토요일 저녁에 어느 카페에서 공연을 한다고 보러 와 달라는 거야. 진짜로 마지막 부탁이라나. 그래서 사람이 사람한테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싶은 사해동포적 마인드로 가 봤지.”


“그래서, 공연하는 모습에서 사초과가 벼과로 변하더라 그런 훈훈한 스토리? 밴드에서 현민씨 파트가 뭔데?”

“드럼.”


세진의 대답은 짧았지만 문비는 세진의 표정과 눈빛에서 길고 세세한 답을 들은 듯했다. 한낮의 숲에 쏟아지는 소나기처럼 시원하고 열정적인 드럼 소리 또한 들은 듯했다. 두 여자의 초여름 오후가 레드와인의 여운 속에 한가롭고 다습게 흘러간다.


*


허전하다.


이따금씩 먼발치에서 무심코 눈에 들어와야 할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하루의 허전함. 그 공백의 폭과 깊이와 질감이 라한에게 당혹감을 주었다. 당혹감은 그의 가슴 속 무언가를 만나서 낯설고 매혹적인 초조로 변했다.


오늘 라한은 특별히 오전 작업을 쉬었다. 새벽에 일어나 산허리를 감아 도는 임도를 삼십여 분 달리고 돌아와 샤워를 한 후 작업대 옆 책상에 앉아 노트북을 열었다. 안톤이 보낸 영상을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어제 통화에서 안톤은 아주 귀한 영상을 보내주겠다 호언했었다.


이메일에 첨부된 파일을 열었다. 안톤의 부친이자 라한의 개인적 스승이기도 한 벤야민의 무뚝뚝한 얼굴이 나왔다. 작업대 앞이었다. 안톤의 목소리가 라한에게 인사를 하라고 하자 벤야민이 얼굴만큼이나 무뚝뚝한 말투로 안부를 물었다.


벤야민 슐츠는 사대 째 내려오는 공방을 지키는 현악기 장인이다. 천성적으로 무뚝뚝한 사람이지만 그가 만드는 현악기들은 결코 무뚝뚝하지 않다. 강인해야 할 때 강인하고 다정해야 할 때 다정하며, 고음은 예리하되 날카롭지 않고 저음은 부드러우면서 선명한 그런 현악기들을 벤야민은 제작해낸다.


라한은 현악기제작학교에서 공부하는 동시에 벤야민의 공방에 드나들면서도 배웠다. 물론 학교에서 만나 친해진 안톤의 소개로 이루어진 일이었다. 공방의 정식 도제라고 할 수는 없었음에도 라한은 마침내 벤야민이 가장 아끼고 기대하는 제자가 되었다.


라한이 현악기제작자에게 필요한 모든 자질을 고루 갖췄다는 것이 벤야민의 평이었다. 뛰어난 손재주, 끈기와 체력, 섬세하고 풍부한 음악적 감수성, 거기에다 현악기에 대한 애정까지. 상당 부분 라한이 어린 시절 사별한 친부 유건에게 영향 받고 힘입은 바일 터였다.


양손을 맞잡고 지그시 눈을 감은 채로 잠시 지체한 벤야민이 눈을 뜨고 성호를 그은 다음 작업대 위에 놓여 있던 바이올린을 들어 올렸다. 그는 라한이 바이올린을 자세히 볼 수 있도록 천천히 각도를 바꿔 가면서 보여줬다. 그러고는 활을 들어 간단한 선율을 들려줬다.


완벽하지는 않은 대칭과 형태를 지닌 바이올린이었다. 그러나 나무의 굴곡과 결을 살리는 데에서 비롯한 비완벽성이 오히려 바이올린의 아름다움을 극대화시켰다. 현의 울림 또한 힘차고 깨끗했다.


17세기에 니콜로 아마티가 제작한 바이올린이라고 벤야민이 말했다. 목소리만 등장하는 안톤으로부터 저 올드 명기를 수선하는 전 과정을 보여주겠다는 말이 들려왔다. 벤야민이 바이올린을 조심스레 내려놓고 연장과 도구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벤야민은 현악기의 제작과 수선을 겸하는 장인이었고 따라서 라한과 안톤도 자연스럽게 제작과 수선을 함께 익혔다. 벤야민은 수선을 겸하지 않는 제작가를 좋아하지 않았다. 수선을 하면 연주자들의 특성을 파악할 수 있고 그걸 다시 제작에 적용할 수 있으므로 수선 또한 제작의 일부라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라한은 정지 버튼을 클릭하고 노트를 꺼냈다. 육안으로 확인되는 특징들을 간단히 메모한 다음 다시 영상을 재생시켰다. 라한은 영상의 정지와 재생을 번갈아 눌러 가며, 아름다운 17세기의 바이올린 그리고 존경하는 스승과 더불어 오전 시간을 보냈다.


중간 중간 메모를 하고, 몇몇 장면은 되풀이 돌려 보고 하느라 아직 영상의 분량은 많이 남아 있었지만 라한은 점심 먹을 시간이 되자 하던 걸 멈췄다. 영상은 매일 어느 정도씩 나누어 보기로 하고, 오후에는 작업대에 앉을 작정이었다.


작업실을 나오니 마당에서 잠자리를 쫓아다니던 깨금이가 반갑게 뛰어왔다. 라한은 깨금을 쓰다듬어주다가 힐긋 건넛집을 돌아봤다. 그림처럼 조용한 집 마당에 바람만이 분주하게 낙엽송 가지를 흔들고 간다.


채집 안 나가고 집안에서 그림만 그리나, 짐작해 보다가 깨금이에게 물었다.


“혹시 넌 아냐?”


문비 언니 뭐하는지.


깨금이가 빙긋 웃었다. 남의 속도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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