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팔레치즈가 들어간 토마토카프레제와 더불어 와인 한 잔씩을 거의 비웠을 때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역시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셰프가 직접 써빙했다.
“스테이크는 최고 등급의 청정 한우를 사용한 미디엄웰던의 필레미뇽, 파스타는 오일 베이스의 씨푸드파스타로 여기 이 매운 소스를 곁들이면 또 색다른 맛을 느낄 수 있을 겁니다. 샐러드에는 사전 주문에 따라 특별히 사과와 잣을 더했습니다. 그럼, 맛있게 드십시오.”
적당한 예의와 과하지 않은 친절을 띤 태도, 갓 지은 흰 쌀밥 같은 목소리로 말하고 셰프는 자리를 떴다.
“어때?”
세진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괜찮네.”
플레이팅, 색감, 향미 등 무엇 하나 나무랄 데 없어 보이는 음식을 보며 문비가 말했다.
“아아니, 저 셰프.”
속삭이는 세진의 말투가 은근했다.
“셰프? 청결해 보이고, 자기 요리에 자부심도 있어 보이고, 괜찮네.”
문비도 덩달아 목소리를 낮췄다.
“일단 사초과는 확실히 아니지? 벼과? 벼과 중에서도 벼 그 자체 아니니?”
“그렇다 치지 뭐.”
이것저것 맛을 보는 문비를 세진이 주시했다. 영양과 문비의 취향과 까다롭다 아니 할 수 없는 입맛을 두루 고려하여 준비한 점심식사였다.
한 입 먹어볼 때마다 문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기는 부드럽고 고소했고, 파스타는 오일 베이스인데도 느끼하지 않았다. 해물은 신선했고 비린내를 완벽하게 잡았을 뿐더러 매운 소스와도 아주 잘 어우러졌다.
“그래서, 어떠니?”
“기대 이상이야. 엄청 맛있다.”
“아아니.”
세진이 혀를 차더니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사람을 한자로는 인간이라고 하는 까닭이 있어요. 사람 인, 사이 간. 사람은 사람 사이에서 살아야 한다 그 말씀이지. 우리 가문비양, 동식물만 우글거리는 산골짜기 들어가 살더니 말귀가 어두워졌달지 센스가 먹통이 됐달지…….”
“뭐? 그 말은…… 저 벼과…… 셰프?”
세진이 격하게 끄덕였다.
“그러니까 나랑……?”
주방 쪽을 향해 문비가 작은 턱짓을 했다. 세진은 한 번 더 격하게 끄덕였다.
“괜한 일 꾸몄다, 너.”
“왜에? 너 요리하는 거 싫어해서 요리 잘하는 남자 좋다고 그랬었잖아? 인간성, 집안 기타 등등까지 다 내가 보장한다니까.”
“아니 난 정말로 됐어.”
스테이크 접시에 같이 담겨 있는 구운 아스파라거스가 문비에게 라한을 연상시켰다.
귀국하고 나니 독일에서 흔하게 먹었던 그러나 특별히 맛있는 줄은 몰랐던 아스파라거스 요리가 종종 그립더라고 그는 말했었다. 특히 흰 아스파라거스, 어찌 보면 밍밍한 맛인 그걸 삶은 감자와 슁켄이라는 훈제 햄과 함께 먹던 그 맛이 늦봄에서 초여름 사이를 지날 무렵이면 꼭 한 번씩 간절할 때가 있다고.
“세진이 너, 저 사람한텐 뭐라고 말해 뒀는데?”
“오늘은 일단 서로 얼굴만 슬쩍 확인하는 걸로. 손님과 셰프로 자연스럽게.”
“다행이다. 그 정도 가볍게 운 뗀 거면 일이 삐끗했다고 해도 크게 실례가 되진 않겠다.”
오늘 문비를 만난 이후 처음으로 세진의 눈빛이 심각해졌다. 보조개가 사라진 입가에 진심 어린 염려가 떠올랐다.
“너, 그렇게 뻗댈 일만은 아냐. 좀 고려해 봐. 네가 마음으로 의지할 사람을 만나면, 어머니도 하늘에서나마 안심하실 거 아니니.”
문비는 ‘누구 있어요?’ 하고 묻던 라한을 생각했다. 그의 조심과 긴장을. 아득하게 빛나던 열기 어린 두 눈을. 다정한 말들, 청량한 미소를.
“세진아. 네가 어떤 마음에서 이러는지, 그 마음.”
가슴께를 손으로 가볍게 두드리고는 문비가 말을 이었다.
“여기에 잘 전달됐어. 지금은 그걸로 됐어.”
후우 한숨을 쉰 세진이 두 손을 들었다.
“그래, 알았다. 네 고집을 누가 꺾어.”
세진은 크게 한 쪽 잘라낸 필레미뇽을 입 안 가득 넣고 불평을 씹듯 꾹꾹 씹어 먹었다. 저 불퉁한 얼굴에 당장 귀여운 보조개를 불러올 방법을 문비는 알고 있었다.
“나 있지, 누군가를 좀 각별한 눈으로 바라보게 된 것 같아.”
‘뭐?’ 하고 되물으려다 사레가 들린 세진이 콜록댔다. 기침을 다 하고 물을 마시는 세진의 눈이 반짝반짝했다.
“설마 인우는 아니겠지?”
실은 인우이기를 바랐다. 인우는 어느 모로 보든 나무랄 데 없이 괜찮은 친구니까.
“아니야, 야. 걔는 또 하나의 가족이고.”
“그럼 누구?”
“나중에. 아직은 그냥 아까 말한 거기까지가 다라서. 아, 이거 하나는 알려 줄게. 구과 쪽이야.”
그런 사람이 있어. 구과 식물을 닮은 남자. 눈이 자꾸 찾는 남자. 말을 하면 귀 기울이게 되는 남자. 마주하고 있으면 돌아서고 싶지 않아지는.
“구과라. 침엽수, 하늘을 향해 똑바르게 자라는 나무들이지. 가문비나무도 구과라서 구과가 눈에 들어왔나? 어쩐지 내 느낌이 좋다. 잘 될 가능성 있는 거지?”
세진의 말에 문비가 설핏하게 웃었다. 흐린 하늘 구름을 뚫고 잠시 뻗치는 여린 빛살 같은 미소에 세진은 마음이 좀 놓였다.
“이 대목에서 와인 한 모금 안 하고 넘어갈 수 있나. 잔 들어, 잔.”
루비 빛깔의 와인이 든 잔을 들고 생글거리는 세진의 입술 양 옆으로 보조개가 생크림 찍어 먹은 자리처럼 폭 피어났다. 그걸 보고 있는 짧은 동안 문비의 마음도 생크림처럼 말랑거렸다. 잔을 부딪는 소리는 쨍 맑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