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짝 친구

by 화진


“이제라도 왕래를 하고 살아야지. 불쌍한 우리 아범, 제 딸이 이리 장성하도록 얼굴 한 번 못 보고 아버지 소리 한 번을 못 듣고.”


할머니가 손수건으로 눈가를 찍어냈다.


“전…… 너무 갑작스러워서…… .”


이성적인 판단과는 별개로 자꾸만 멈칫멈칫 뒷걸음질치는 감정 때문에 문비 자신도 혼란스러웠다.


“아무래도 그렇겠지. 엄마, 좀 천천히요. 애한테도 받아들일 시간을 줘야지. 오빠가 뭐랬수? 오빤 다른 거 다 필요 없고, 애 마음 애 행복이 최우선이라고 했잖아요.”


“아니, 그래도 그게 지금…….”


물러서지 않으려는 할머니의 어깨를 고모가 감싸고 다독였다.


“이러심 안돼요. 오빠한테 문비 마음이 중한 만큼 우리한텐 오빠 마음이 중하잖아.”


고모가 찬찬히 할머니를 설득했다. 침을 묻힌 연필을 꾹꾹 눌러 글씨를 쓰듯 부드러움과 단호함을 섞은 말이었다. 이때만큼은 고모의 표정도 잠깐 어두워졌던 것 같다.


헤어질 때 문비는 고모로부터 아버지와 고모의 연락처를 받았다. 안 그래도 그건 받아 놓고 싶었는데 말 꺼내기 전에 고모가 알아서 챙겨줬다. 할머니는 뭔가 할 말이 남은 사람의 표정으로 마지못해 돌아섰다.


멀어지는 두 분의 뒷모습을 보다가 문비는 핏줄의 힘이라는 게 있긴 있나 보다 했다. 오늘 처음 보는 낯선 저들을 만약 혈육으로서가 아니라 다른 일로 만난 거라면 이렇게 내내 눈으로 배웅하고 섰진 않았을 테니까.


차 있는 곳으로 걸어가며 세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세진은 국립수목원 소속의 연구원으로 전문 분야는 사초과와 벼과 식물이었다. 대학에서 만난 단짝친구인데 같은 유치원에 다녔었다는 사실을 알고부터는 인우와 셋이서도 자주 어울렸었다.


세진은 당장 반차를 내고 문비를 만나러 나오겠다고 했다. 문비는 하루 묵어 갈 거라고 바쁘면 내일 봐도 된다고 했지만 세진은 막무가내였다. 점심은 먹었느냐는 세진에게 문비가 아직이라고 하자 세진은 그거 아주 잘 됐다며 좋은 걸 먹여 주겠다고 큰소리쳤다.


늦은 점심이 될 약속 시간까지의 짬을 문비는 자주 다니던 헌책방에서 보냈다. 오랜 단골을 알아본 주인 할아버지는 요사이 왜 그리 뜸했냐며 반가워했다. 그러고는 마침 잘 왔다고, 가게를 옮기게 됐다고 알려 왔다.


멀리는 아니고 골목 저 안쪽 어디라고. 거기가 큰길가인 여기보다 세가 훨씬 싸다고.


찾아오는 사람 구경하기가 나날이 힘들어지는데, 그게 거스를 수 없는 거대한 흐름이라고들 하니 어찌하겠느냐고. 여기 나와 앉아서 사람 음성 몇 마디 못 듣는 날이 많은데, 여긴 보다시피 저렇게 무수한 말들이 고요한 글자의 외피를 입고 모여 앉아 왁자지껄하는 곳이라 귀가 무료할 틈은 없다고.


초탈한 웃음소리가 그치자 정적이 찾아왔다. 차갑게 내온 미숫가루가 담긴 그릇에 맺혔던 수증기가 소리 없이 흘러내렸다.


문비가 찾던 책을 종이가방에 넣어 주며 주인 할아버지는 말했다. 이거 찾는 사람 얼마 전에도 있었는데 없다고 하고 안 팔았어. 왜냐고? 그냥, 내 마음이지 뭐. 그러고는 또 허허 소리 내어 웃었다.


배웅하는 웃음과 웃음소리가 바람처럼 자유로워서 뒤돌아 나와 세진을 만나러 가는 문비의 기분도 무겁기보다 가뜬했다.


세진이 문비를 데려간 곳은 모던한 분위기의 레스토랑이었다. 점심시간이 좀 지났다고는 해도 손님이 너무 없었다. 없다 못해 문비와 세진 둘뿐이었다.


“왜 이렇게 손님이 없어?”


깔끔하게 정돈된 내부를 둘러보며 문비가 소리 죽여 물었다.


“내가 통째 빌렸으니까. 널 위해서.”


농담이 틀림없을 텐데 농담이 아닌 것도 같은 어감의 대답을 하고는 세진이 웃었다. 양 입가에 보조개가 오목 패는 것이 정말 즐거울 때 나오는 웃음이었다.


셰프인 듯한 남자가 물을 가져다주고 주방 쪽으로 사라졌다.


“메뉴를 왜 안 주지?”


“내가 미리 주문을 했으니까.”


“뭘 시켰는데?”


“지금 너한테 딱 필요한 것들. 뭘 것 같아?”


“음, 네가 생각하는, 지금 나한테 딱 필요한 것들이라면. 아마도 몸보신 플러스 도회의 맛?”


“바로 그거지. 너 산골짜기에 혼자 있으면서 어떻게 먹고 살았을지 안 봐도 뻔하니까.”


레드와인이 먼저 나왔다.


“입맛 돋우게 이것부터 한 잔 하자. 혹시 차 가져 왔어도, 돈 워리. 내가 대리운전 불러 준다. 아주 안전한 대리운전으로.”


차는 헌책방과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채선이모네 아파트 주차장에 들러 세워 두고 왔지만 문비는 은근슬쩍 세진을 떠봤다.


“누구, 널 해바라기하는 그 사초과 남자?”


사초과는 세진이 붙인 별명이고 그의 이름은 유현민, 공기업에 다니는 회사원이다. 사초과 식물은 주로 잡초에 속하는데, 세진이 현민을 사초과라고 부르는 건 특별히 눈이 가는 매력을 발견하지 못하겠다는 이유에서였다.


대답 대신 의미심장한 미소와 함께 어깨를 으쓱해 보인 세진이 와인잔을 들어 내밀었다. 종일 거의 빈속이라 입술만 축이고 내려놓으려던 문비였지만 잘 숙성된 와인의 오크향이 너무 좋아 그럴 수가 없었다.


“이런 거 제법 고가일 텐데, 너 이렇게 무리해도 돼?”


“돼, 돼. 내가 한여름 땡볕에도 현장 돌아다니고 또 사무실에선 종일 목이 구부러져라 표본 들여다보고 그러는 게 다 뭘 위해서겠니? 물론 식물이 좋아 그런 것도 있지만 다 먹고 살자고, 가끔은 친구 입에 좋은 와인도 넣어 주고 그러자고 하는 일이지.”


구체적인 내용은 좀 달라도 비슷한 취지의 말을 예전에 문비가 세진에게 한 적이 여러 번 있었다. 세진이 아직 고정 수입 없는 대학원생이었을 때, 밥 사 먹이고 술 사 먹이고 그러면서.


“오오, 한세진이, 아주 잘 컸네. 키운 보람이 있네.”


문비가 넉살을 피웠다. 할머니, 고모를 만나느라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던 신경을 몇 모금의 와인이 살짝 누그러뜨려 준 것이다.


“그치? 내가 원래 받은 사랑 보람으로 돌려주는 성격 아니니. 참, 너 작업한 그림 보고 싶은데. 카메라에 담아 왔지?”


“안 그래도 너 궁금할 것 같아서 가져 왔지. 자 여기. 객관적인 시각에서 괜찮은지 봐줘.”


“와 좋다, 그림들. 참 신기하지? 식물학 그림은 정확하게 그릴수록 식물이랑 꽃 본연의 아름다움이 더 살잖아. 어머, 이거 으름덩굴이지? 으름덩굴에 핀 꽃 참 예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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