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해 봐요. 뭔데요?”
되묻는 문비의 태도는 무심하고 산뜻했다. 반면 라한의 기색에서는 조심과 긴장이 배어났다. 라한은 마른침을 삼키며 말을 가다듬고, 문비는 의아한 기색을 담은 눈을 크게 떴다.
“누구…… 있어요?”
“네?”
문비는 라한의 조심과 긴장 너머에서 일렁이는, 아슬하고도 달콤한 무언가를 막연히 느끼고 즐기고 있으면서도 스스로도 그 사실을 몰랐다.
“그게…… 만나는 사람, 그러니까 사귀는 사람 있어요?”
“아뇨.”
조용하지만 명쾌한 대답이 라한을 안도와 희망으로 인도했다.
라한의 반듯한 미간이 환해졌다. 동시에 두 사람 사이에 서먹함이 내려앉았다. 그건 딱딱한 서먹함이 아니라 말랑거리는 서먹함. 멀리 밀어내는 서먹함이 아니라 더 가까이 당기는 서먹함이었다.
작업대 옆 책상에 놓인 라한의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미묘하고 은근하게 정체돼 있던 공기가 진동음을 따라 다시 물결쳤다. 라한이 책상 있는 곳으로 가 휴대전화를 들여다봤다. 발신인은 미텐발트의 안톤이었다.
“전화 받으세요. 저 이만 갈게요. 저도 일해야죠.”
벌써 종이가방을 챙겨 든 문비가 빠르게 그러나 부드럽게 말하고 문을 열었다. 라한은 통화 버튼을 눌러 ‘잠깐.’ 하고 말해 놓고는 책상에 휴대전화를 두고 문비를 뒤쫓아 나갔다.
“조심히 가요.”
다정한 인사를 건네는 라한의 얼굴도, 돌아보며 ‘네.’ 하고 대답하는 문비의 얼굴도, 약간 상기된 빛이었다. 젊은 낯에 서린 연연한 홍조가 서쪽 하늘 구름 붉게 적시는 노을보다 고운 찰나가 있었다.
*
강렬한 예감?
뚜렷한 징후?
휴대전화에 뜬 열한 개의 숫자 앞에서 문비는 불가해한 끌림을 느꼈다. 며칠 사이 부재중 전화로 두어 번 들어와 있었던, 010으로 시작하는 번호였다. 모르는 번호인데 어쩐지 꼭 받아야 하는 전화일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런 예감 때문에 오히려 망설임은 길어졌고, 어느 순간 발신음이 끊겼다. 연거푸 다시 걸려온다면 전화를 받겠다고 결심했다. 문비가 눈을 떼지 않은 휴대전화의 화면 이내 밝아지고 그 번호가 다시 떴다.
“여보세요.”
“문비, 문비냐?”
노년 여성의 목소리가 대뜸 이름을 대며 물었다. 문비의 기억에는 없는 목소리였다. 그런데도 왠지 가슴이 덜컥 했다.
“네, 그런데요. 누구…… 세요?”
정한이 느껴지는 한숨 소리가 전화 저편에서 넘어왔다.
“내가 네 할미란다, 할미.”
휴대전화 너머에서 급작스레 등장한, 익숙한 호칭의 낯선 사람.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 알 수 없어 문비의 입술이 굳었다. 할머니? 외할머니는 돌아가셨다. 그럼 친할머니?
“네가 가문비, 아버지 이름이 가영후, 네 어미 이름이 이정인, 맞지?”
침묵이 답답한지 저편의 목소리가 확인삼아 물어왔다.
“네.”
“그러니 네가 우리 자손이 틀림이 없다니까. 할미다. 내가 네 친할미라고. 하기야 이날 이때껏 얼굴을 한 번 보길 했어, 목소릴 한 번 듣길 했어. 어리둥절하고 말문이 막힐 만도 하지. 이게 다 네 어미 그 독하디독한 인사 때문…….”
늘어지던 푸념이 그쪽의 다른 목소리에 가로막혀 끊겼다. ‘엄마!’ 하고 다급하게 외치는 질책조의 목소리였다. 나이 지긋한 여성의 것이었다. 그러고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전화가 끊어지기라도 한 건가 싶어 문비는 휴대전화 액정 화면을 봤다. 통화 시간이 계속 카운트되고 있다. 이쪽에 들리지 않게 무슨 얘기들을 나누고 있나 보았다. 비교적 담담하게 문비는 기다렸다.
“여보세요? 안 끊었지?”
“네, 말씀 하세요.”
“좀 봤으면 한다. 이 할미는 네가 너무 보고 싶구나.”
결국 다음날로 약속을 잡았다. 할머니라는 이는 오후에 제주도행 비행기를 타야 한다고 했다. 점심을 함께 먹자는 제안을 문비는 거절했다. 약속장소는 조용한 찻집으로 정해졌다. 휴대전화를 놓은 문비는 창가를 서성였다.
외로웠던 그러나 단출함이 싫지 않았던 삶의 결이 시나브로 엉클리고 있는 듯한 기분. 어렴풋이 궁금해 했던 삶의 내력에 한 걸음 다가섰다는 기분. 이런 저런 기분이 얼크러져 생성된 착잡함이 수렁처럼 두 발을 잡아당기는 것 같다.
온밤을 울어 예는 여름새 소리가 규칙적으로 고요를 가르고 들어왔다. 여리고 적막한 그 울음소리를 하나 둘 세면서 문비는 숲을 검게 물들인 밤을 오래도록 응시했다.
잠을 설치고도 새벽에 눈이 절로 떠졌다. 아직 아침이슬 축축할 때 문비는 길을 나섰다.
오랜만에 앉은 운전석에서 가장 먼저 눈길이 닿은 건 백미러에 매달린 오래된 염주였다. 엄마가 남긴 것들 가운데 하나였다. 엄마는 불교 신자도 아니면서 일 년에 한 번 동지 절기에는 절에 다녀오곤 했다. 종교에 무관심한 문비는 그저 그러려니 하면서 엄마가 얻어오는 팥죽을 맛있게 먹었더랬다.
언젠가 지나가는 말로 어디에 있는 무슨 절이냐고 물은 적은 있었다. 엄마는 속리산 부근의 작은 암자라고 대답했고 문비는 더 캐물을 필요를 못 느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만의 시간과 자기만의 장소를 필요로 하는 존재니까. 엄마에게는 동짓날 산사행이 그런 것이겠거니 했다.
새벽부터 서두른 덕분에 한 시간도 더 일찍 약속장소 부근에 도착했다. 꽤 넉넉한 시간이지만 다른 일을 보기에는 짧은 겨를이었다. 문비는 찻집 근처를 차로 배회하며 적당한 거리에 있는 주차장을 찾아 주차를 하고 찻집까지 천천히 걸어갔다.
계절의 은혜는 대도시에도 구석구석 깃들었고, 나무들의 초여름은 숲에서나 여기에서나 싱그러운 푸른빛이었다. 그러나 코와 목에서 느껴지는 탁한 먼지 맛에 벌써부터 숲이 그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