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플링

by 화진


작업대 위에는 장차 바이올린이 될 앞판과 뒤판이 놓여 있다. 아까 퍼플링 채널을 파 놓은 것들이다. 가늘고 긴 퍼플링을 밴딩 아이언에 대고 열로 굽혀서 채널을 따라 심어 넣는 라한의 손길은 명료하면서 섬세하다.


퍼플링도 재질은 나무다. 모르고 보면 심미적인 검은 윤곽선으로 보일 뿐이지만 기실 퍼플링은 바이올린이 충격을 받았을 때 쪼개짐을 막아 주는 역할을 한다. 뒤틀림도 방지한다.


사람에게도 퍼플링과 같은 장치가 있을까? 있다. 사랑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바이올린의 퍼플링처럼 사람을 고난에 부서지지 않게끔 지탱해 주는 것이다.


정교하고 깨끗하게 퍼플링이 들어간 바이올린 판을 찬찬히 바라보다 라한은 스스로에게 물었다. 나는 지금 누군가의 퍼플링이고 싶은 것인가? 각성처럼 심장 어딘가가 욱신거렸다. 달곰한 욱신거림…….


아칭 부분을 매끄럽게 다듬고 나서는 둥근 끌로 속을 파내는 작업에 들어갔다.


예리한 금속 날이 나무를 깎아내는 소리조차 사각사각 청아했다. 이번 나무는 손에 잡는 순간부터 느낌이 좋았다. 손가락 마디로 통통 두드려 보는 순간 직감했다. 깊고 유려한 울림을 간직한 나무라는 걸.


그 울림을 제대로 된 노래로 만들어 주는 건 라한의 손에 달렸다. 라한은 아주 잘 해볼 작정이었다.


작업에 열중한 나머지 라한은 노크 소리를 듣지 못했다. 깨금이가 옆에 와 낮게 낑낑대고서야 손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신통하게도 깨금이는 라한이 작업을 하고 있을 때는 절대로 짖는 소리를 내지 않았다.


문 두드리는 소리가 다시 났다. 은성과 문비였다. 라한이 깨금이의 머리를 쓰다듬고 목줄을 채웠다. 채우면서 이유를 설명해줬다. 문비를 위한 배려였다.


“안녕, 깨금?”


은성과 함께 문 밖에 서 있던 문비가 허리를 굽혀 시선을 낮추고 다정하게 인사했다. 라한과 깨금이는 문 안에 있었다. 깨금이는 의젓하게 앉은 채로 활짝 웃으며 꼬리를 흔들었다. 문비와 깨금이 사이는 채 두 걸음이 되지 않았다.


“나 없는 새 둘 사이에 진전이 좀 있었네?”


은성이 문비에게 말하고는 라한을 향해 방긋 웃었다. 라한은 은성의 말이 문비와 깨금이를 가리키는 건지 문비와 자신을 가리키는 건지 모호해서 열없이 깨금이 머리만 쓰다듬었다.


“깨금아, 이리 와.”


손을 내미는 은성에게 깨금이 다가가고, 문비는 몇 걸음 물러났다.


“어디 가게?”


리드줄을 건네주며 라한이 물었다. 은성은 살굿빛 리본이 묶인 플로피햇을 쓰고 역시 살굿빛 계열의 백팩을 매고 있었다.


“오랜만에 깨금이랑 산책도 하고 저 아래 할머니들도 뵙고 오려고. 앙금떡이랑 간식거리들 사 온 것도 갖다 드릴 겸해서.”


“할머니들 밭일 나가시고 안 계실지도 몰라요.”


문비가 말했다.


“안 계시면 한실댁 할머니네 냉장고에 넣어 놓고 전화 드리지 뭐. 라한이 넌 이참에 문비씨한테 작업실 구경 시켜주면 되겠다. 궁금해 하는 눈치던데.”


말을 마친 은성은 곧장 깨금이를 데리고 마당을 가로질러 가 버렸다.


남은 두 사람은 멀뚱멀뚱 서로를 바라보다 희미하게 웃었다.


“작업실, 보실래요?”


“네. 실은 전부터 궁금했는데 함부로 막 보여 달라 그러는 건 좀 아닌 것 같아서 참았어요.”


식물학 그림을 그린다고 말하면 무턱대고 하나 그려줘 보라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 문비는 그런 무신경함이 싫었다.


“들어와서 맘껏 봐요. 별 것 없지만.”


문간에 서 있던 라한이 옆으로 비켜서서 길을 터주었다.


“그럼, 실례할게요.”


뒷짐을 지고 사뿐 문 안으로 들어선 문비는 먼저 들고 있던 종이가방을 출입문 근처 바닥에 내려놓았다. 은성이 화병에 대한 답례로 나눠준 게샤 원두가 든 종이가방이었다.


온도와 습도를 나무 보관에 적합하게 조절해 놓은 작업실 안은 쾌적했고 어렴풋하게 떠도는 나무 냄새로 향긋했다. 문비는 작업대에서부터 천천히 공간을 둘러봤다. 무언가에 호기심이 일면 묻기도 전에 라한이 알아채고 설명했다.


“현줄, 튕겨 봐도 돼요.”


제작이 끝난 현악기들이 진열된 곳, 한 바이올린 앞에서 망설이는 문비에게 라한이 말했다.


“정말 괜찮아요. 연주하라고 만든 악기인 걸요. 튕겨 봐요.”


문비가 검지로 바이올린의 현 하나를 가볍게 튕겼다. 짧고 영롱한 소리가 맺혔다 사라졌다. 이어 나머지 세 현도 차례로 울려 음을 확인한 문비가 네 줄의 현을 통통 튕겨 몇 도막의 가락을 만들어냈다.


“기차는 여덟시에 떠나네.”


문비의 서툰 피치카토가 만들어낸 음계는 라한이 제목을 알아맞힐 만큼 정확했다.


“아그네스 발차가 부른 걸 엄마가 좋아해서 저도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거든요.”


또 의문이 고개를 든다. 엄마는 대체로 유쾌한 사람이었는데, 왜 노래는 죄다 그토록 처연한 것들만 좋아했을까?


“우리 어머니도 좋아하는 노래예요. 다만 조수미가 부른 우리말 버전으로요.”


“그래요? 왠지 반가운데요?”


문비가 라한을 향해 돌아섰다.


“저…… 나, 문비씨한테 묻고 싶은 말이 있는데.”


라한의 두 눈이 깊게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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