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이 주거니 받거니 야생화의 아름다움에 대한 찬양과 감탄을 주고받는 사이 라한이 거실로 들어왔다.
“왔어요? 문비씨 여기 있는 동안 깨금이는 별채에 있기로 했어요.”
라한이 문비를 안심시켰다.
“네. 근데 깨금이한테 좀 미안하네요.”
“괜찮아요. 깨금이가 문비씨 이해한다고 전해 주라던데요.”
“깨금이가 마음이 넓어 못난 저를 이해해 주니 다행이에요. 이따 갈 때 잠깐 보게 해줘요. 이젠 얼추 두세 걸음 간격까지는 다가갈 수 있을 것 같아요. 두 분 중 한 분이 깨금이 옆에 붙어 있어 주신다면요.”
두 사람이 깨금이를 주제로 격의 없는 대화를 이어나가는 걸 바라보던 은성이 조용하게 그 자리에서 물러났다. 은성은 화병을 창가 콘솔 위에 두고 주방으로 들어가 원두를 꺼냈다.
맞은편에 앉은 라한과 그 뒤로 저쪽 주방에 있는 은성이 문비의 시야에 한꺼번에 들어왔다. 라한은 두 팔꿈치를 무릎에 얹고 손은 깍지를 낀 채로 상체를 조금 숙인 자세로 얘기를 하고, 은성은 주방 식탁 앞에 서서 커피를 내린다. 보고 있으려니 눈매가 절로 순해진다.
지금 이 공간을 채우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 무언가가 무얼까. 사소하지만 소중한 것, 익숙한 것. 그러나 문비가 꽤 오래 잃고서 지내 온 것. 그것은 안정감이었다. 엄마가 아프다는 걸 알게 된 순간 문비에게서 떠나가 버렸던 것.
정말 돌아온 걸까, 그것이?
“어제 깨금이하고 산책 나갔다가 한실댁 할머니하고 설기를 만났거든요. 그렇게 길 가운데에서 정면으로 마주친 건 처음이었어요. 깨금이하고 설기, 어땠을 것 같아요, 문비씨 생각에는?”
라한의 표정에 황당함과 즐거움이 섞였다.
“설마 설기가 깨금이도 겁을 안 내고 뿔로 받으려고 했나요?”
“설기가 뿔을 내밀면서 제 쪽을 향하니까 한실댁 할머니께서 줄을 잡아당기셨죠. 하지만 설기 힘을 당해내실 수가 있나요. 처음엔 태평하게 보고만 있던 우리 깨금이도 사태가 그렇게 돌아가니 저를 지켜준답시고 반사적으로 앞을 가로막고 이빨을 드러냈죠.”
“저런! 하마터면 큰일 날 뻔 했네요.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요? 아까 설기 봤는데 말짱하던데요?”
“깨금아 도망가자! 하고는 줄을 당기면서 뒤돌아 뛰었죠.”
문비가 허탈하게 사풋 웃었다.
“별나신 우리 설기님 기만 더 살았겠네요. 근데 설기도 참 별종은 별종이에요. 산짐승은 기척만으로도 혼비백산하면서 깨금이는 또 겁을 안 내고.”
“어떤 기운 같은 걸로 아는 거죠. 깨금이가 먼저 공격하지 않을 거라는 걸 말이에요.”
그럴 것이다. 누울 자리를 봐 가며 다리를 뻗는, 용한 염소다. 까칠한 성질머리조차 귀여운. 물론 이건 문비가 설기의 태어나고 살아온 이력을 다 알기 때문이겠지만.
신선한 원두로 갓 내린 아이스커피를 은성이 내왔다. 얼핏 맡으면 커피보다 허브티를 연상케 할 정도로 풍부하고 복합적인 꽃과 과일의 향이 특징적인 커피였다. 콜롬비아에서 온 게샤 품종이라고, 올해 것이 작년 것보다 맛과 향이 더 짙어졌더라고, 은성이 설명했다.
“자, 마셔요.”
“실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거예요.”
한 모금 마시고 잔을 내려놓는 문비의 얼굴에 잔잔한 만족감이 어렸다. 이어 눈자위에 쓸쓸한 물기가 돌았다. 커피 취향도 엄마의 유산이랄까 영향이었다.
작년 여름, 섭취 금지 식품 가운데 하나인 커피를 엄마는 무던히도 그리워했다. 문비를 볼 때마다 노래삼아 졸랐다. 게샤 한 모금만. 아이스로 딱 한 모금만. 그냥 머금기만 했다가 뱉을게.
결국 문비는 지고 말았다. 엄마는 약속한 대로 딱 한 모금만 입에 댔다. 그러나 약속과 달리 뱉지 않고 삼켰다. 오래오래 머금고 있다가 삼켰다. 삼키고는 행복하게 ‘아 맛있다!’ 했다.
사실 그때 혀와 입에서는 아무런 맛도 못 느꼈다고, 그래도 마음으로 맛있었다고. 문비는 엄마가 돌아가신 다음에야 채선이모로부터 전해 들었다.
갑자기 가만해진 분위기 속에 은성은 자신이 이곳을 비운 동안 일어난 변화를 감지했다. 그러니까 라한과 문비의 사이에 일종의 유대 같은 것이 움텄다는 걸.
“얼마 전에 돌아가신 엄마가 제일 좋아한 커피이기도 하고요.”
갑자기 숙연해진 까닭을 모를 은성을 위해 문비가 덧붙였다. 은성이 문비의 손을 가볍게 잡았다가 놓았다. 작고 따스하고 보송한 손이었다. 문비가 주의를 환기하는 헛기침을 하고 고개를 반짝 들었다.
해말갛게 띤 웃음으로도 서늘함은 다 지워지지 않았다. 그런데 그 서늘함이 푸르른 젊음과 아름다움을 훼손하기는커녕 오히려 도드라지게 만들었다. 보는 이의 마음을 아리게 매혹하는 모순적인 아름다움이었다.
“언니. 이제 그만 저한테 말씀 낮춰 하세요.”
“그래도…… 될까요?”
“그럼요.”
라한이 슬그머니 일어났다. 작업실로 돌아가려는 것이었다. 새로 만들기 시작한 바이올린의 작업이 기대 이상으로 순조로워 요즘은 작업대 앞에 앉는 것이 한층 즐거웠다. 혼자 있을 깨금이도 눈에 밟혔다.
“작업실 가려고?”
라한은 가볍게 끄덕이고 거실을 나왔다.
작업실에 놓인 커다란 안락의자에 앉아 창밖을 보던 깨금이가 라한이 들어서는 걸 보고는 어슬렁어슬렁 의자에서 내려왔다. 라한이 깨금이의 턱을 긁어주며 의자에 앉았다.
울창한 숲과 산이 창을 그득 채웠다. 우거진 녹음 위를 구름의 그림자 한 점이 미끄러지듯 흘러간다. 어느덧 초여름, 청록으로 흐드러진 산중 풍경이 나무 정령의 낮잠처럼 고요하고 한가롭다.
구름의 그림자일까, 깨금이가 보고 있었던 건? 라한의 중얼거림에는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천천히 산을 오른 구름의 그림자가 산봉우리에 이르러 조금씩 작아지다 마침내 사라지자 깨금이는 몸을 일으켜 저쪽의 마룻바닥으로 가 엎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