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철

by 화진


라한네 마당에서 저 멀리 오른편으로 비껴 눈에 들어오는 산비탈 계단밭에 감자꽃이 하얗게 피었다. 한실댁의 감자밭이었다. 한실댁이 심고 가꾸는 농작물은 종류 불문 전부 실했다. 감자면 감자, 콩이면 콩, 들깨면 들깨……. 하나같이 꽃도 좋고 열매도 옹글었다.


저렇게 뭐든 충실하게 길러내는 덕이 있는 손을 가진 한실댁인데. 다 죽어가던 새끼염소도 살려내서 염소 꼴 나게 만들었는데. 자식도 점지만 해 줬으면 보란 듯이 훌륭하게 길러냈을 텐데. 삼신할미 눈이 어두워도 이만저만 어두운 게 아니라고.


내앞댁과 흰돌댁이 뒤에서 혀 차며 얘기 나눈 적이 있었다. 흉을 잡자는 게 아니라 딱해서 구시렁거려 본 것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한실댁네 감자밭에서 감자꽃을 관찰하고 채집하던 문비조차도 잠깐 그 비슷한 생각이 들 정도였다. 문비의 엄마 정인도 생전에 겉으로 표를 내지는 않았지만 한실댁의 무자식을 많이 안타까워했었다.


감자밭을 나오던 문비는 저 아래 개천 옆 도로로 낯선 승용차 한 대가 올라오는 것을 발견했다. 검고 커다란 고급 승용차는 금세 공터에 도착했다. 라한과 문비의 차가 나란히 주차돼 있는 공터였다.

뒷좌석에서 내리는 은성이 보였다. 점잖은 차림이 자그마한 몸집에서 좀 겉돌았다.


운전석에서 내린 사람은 정장 차림의 중년 남자였는데 은성을 대하는 태도가 어딘지 깍듯했다. 아마 고용된 기사인 모양이었다. 짐을 들어다 주려는 중년 남자를 은성이 만류하는 듯한 품새의 짧은 실랑이를 볼 수 있었다.


별채 작업실에서 나온 라한이 빠른 걸음으로 공터로 내려가는 모습이 보였을 때 문비의 얼굴도 감자꽃처럼 피었다. 제 얼굴이지만 정작 자기 자신은 모르는 얼굴이었다.


“은성이 처자가 돌아왔구먼.”


밭가에 제멋대로 자란 잡초를 매던 한실댁이 문비 옆으로 왔다. 눈가 주름 사이로 반가움이 스몄다.


“네. 깨금이가 아주 반색을 하네요.”


“보기 좋은 남매야. 한 번씩 이렇게 멀리서 건너다보고 있으면 참말 그림 같다 싶어.”


“네.”


문비는 진심으로 동감했다. 피 한 방울 안 섞였으면서도 서로에 대한 이해와 존중, 우애의 깊이만큼은 어느 친남매 못지않음을 저들의 언행을 통해 여러 번 느꼈던 바였다.


“감자꽃은 다 봤어?”


“네, 실컷 보고 채집도 다 했어요.”


돌아보며 웃어 보이는 문비의 숨은 외로움을 한실댁의 연륜이 꿰뚫어봤다. 동기간 하나 없는 외동으로, 천지간에 두 모녀뿐이라면서 엄마를 잃었으니, 아무렇지도 않은 척해도 그 속이 오죽할까. 한실댁은 아무 말 않고 목장갑을 벗은 맨손으로 문비의 머리칼을 쓸어 주었다.


“저쪽에 은방울꽃 있던데 좀 꺾어 가련?”


“은방울꽃이요? 네, 좋아요.”


“가 보자. 근처에 큰까치수염하고 반디지치도 있을 거야. 그렇게 세 가지를 합하면 꽤 어울리겠지?”


“그럼요, 더할 나위 없는 조합이죠. 할머닌 정말 모르시는 게 없어요.”


한실댁과 문비가 짙게 드리운 녹음 속에서 꽃을 꺾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꽃철이었다. 이내 꽃가지가 손안에 넉넉히 모였다. 붉은인가목의 꽃봉오리도 발견하여 두어 송이 보탰다.


“나는 밭가에 풀 매던 것 마저 매고 갈 거니까 문비학생은 얼른 들어가 봐. 뙤약볕에 고운 얼굴 다 타겠다.”


“할머니.”


“왜, 뭐?”


“은성 언니는 은성 처자고 저는 문비학생이에요? 저 학생 아닌 지 벌써 몇 년이나 됐어요. 이제 학생 떼 주세요.”


“그래. 그럼 이제부터 문비 처자, 해 줄까?”


한실댁이 농담을 했다.


“그냥 문비야, 해 주세요.”


“그래, 알았다. 그냥 문비야. 얼른 가 보거라.”


한실댁이 또 장난을 쳤다. 감자밭 근처에서 아까시나무의 잎을 뜯어먹고 있던 설기가 나른한 소리로 매애애 참견을 했다. 문비는 웃음으로 인사하고 집 쪽으로 길을 잡았다.


문비가 집에 거의 다다랐을 때,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은 은성이 건넛집 마당으로 나왔다. 같이 나온 깨금이가 낮은 소리로 짖어 문비를 알은체 했다. 은성이 손을 흔들면서 마당 끝으로 왔다.


“문비씨. 잘 지냈어요?”


두 손을 입에 대고 외치는 은성의 모습이 한실댁 말마따나 동화 속 삽화 같다.


“네. 잘 다녀오셨죠?”


“이리 건너 와요. 좋은 원두가 나왔기에 챙겨 왔어요. 와서 맛 봐요.”


“네. 갈게요.”


안으로 들어간 문비는 서둘러 화병 두 개와 꽃가위를 꺼냈다. 안 그래도 은성에게도 꽃을 좀 나누어 줄 작정이었다. 빠르고 능숙하게 두 개의 화병꽂이를 뚝딱 완성했다. 거의 대동소이한 모양새의 두 화병을 꼼꼼히 살펴보던 문비는 그래도 조금 더 구도가 좋고 예뻐 보이는 것으로 골라 안고 집을 나섰다.


“어머, 은방울꽃이네. 청초하기도 해라.”


마당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화병을 받아 든 은성이 기뻐했다.


“연붉은 꽃봉오리 달린 가지는 붉은인가목나무인데 장미과에 속하고 꽃은 해당화를 닮았어요. 그리고 이거요, 안에 흰 별무늬가 있는 푸르고 작은 꽃, 이건 반디지치.”


은성이 모르는 꽃을 문비가 알려 주었다.


“큰까치수염은 나도 알아요. 반디지치? 파란 별 안에 또 흰 별이 있네요.”


“반딧불이를 닮았다고 반디지치. 아, 화병도 드리는 거니까 안 돌려주셔도 돼요.”


남승효 교수의 별장에 있는 크고 작은 화병들 대부분이 문비가 가져다 놓은 것이었다. 방금 문비가 은성에게 준 것은 그 중에서도 가장 좋은 축에 속했다.


“정말요? 그래요, 그럼. 기꺼이 받을 게요.”


크지도 작지도 않은, 어찌 보면 어중간하고 어찌 보면 희소성 있는 크기의 크리스탈 화병은 은성의 취향에도 잘 맞았다.


이전 03화아픈데 달금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