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와 염소와 그와 그녀

by 화진


집으로 가기 위해 앞장서는 설기를 문비가 줄을 잡고 따랐다. 거듭된 반복, 습관, 본능, 그런 것들에 기초하여 설기는 능숙하게 산 아래 도로를 찾아 내려간다. 도로에서도 곧바로 자기네 집이 있는 아래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우와, 우리 설기 애기 때도 똑똑하더니 여전히 똑똑하네.”


문비가 너스레를 떨며 칭찬했다. 설기는 짧은 꼬리를 푸르륵 한 번 털고는 따박따박 걸었다.


“매애애, 매애애애애.”


조용히 걷던 설기가 울음소리를 냈다.


“소나긴가?”


이마를 때린 물기를 닦으며 문비가 하늘을 올려다봤다. 불과 몇 초만에 비가 시작되었다. 설기는 시끄럽게 울어대면서 걸음을 재촉했다.


“알았어, 알았다고. 조금만 참아. 가다가 언니 집에 들러서 우산 씌워 줄게.”


설기를 따라 반 뛰듯이 걸으면서 문비가 달래 봐도 소용없었다. 설기는 죽을 듯이 매애애 매매애애 울부짖었다. 요컨대 비를 맞아 기분이 나쁘다는 거였다.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남의 염소 잡는지 알겠다. 별난 염소인 줄은 알았어도 이렇게 극성일 줄은 몰랐다.


쓴웃음 짓던 문비의 먼 시야에 사람이 들어왔다. 커다란 우산을 쓰고 또 우산을 하나 들고 라한이 달려오고 있었다.


“그만 오세요!”


라한이 저만치 가까워졌을 때 문비가 소리쳤다.


“네? 왜요?”


영문을 알 리 없는 라한이 어리둥절하여 걸음을 늦추고, 설기는 요란한 울음소리를 내면서 뿔을 내밀어 라한을 향해 돌진하고, 문비는 줄을 잡고 안간힘 쓰며 버티다 끌려가고. 가늘지도 굵지도 않은 빗줄기는 시원하게 내리긋고.


“조심해요!”


앗 하는 사이 설기의 뿔이 라한의 다리에 닿았으나 그는 민첩하게 옆으로 돌아 아슬아슬한 순간을 모면했다.


“얘가 낯선 사람을 보면 들이받거든요. 괜찮은 거죠?”


문비의 말에 웃음기가 묻었다. 일단 안도하고 나니, 라한의 놀라고 당황한 표정이 우스웠던 것이다. 설기는 못마땅한 울음소리를 계속 내지르면서 라한을 향한 경계 태세를 풀지 않았다.


“괜찮아요.”


예상치 못하게 전개된 상황에 라한도 실소했다. 그는 설기의 뿔이 미치지 못하는 반경으로 빙 돌아 문비의 옆으로 가서 쓰고 있던 우산을 건넸다. 그러고 자신은 다른 우산을 켜서 들었다.


“고마워요. 라한씨는 설기한테 가까이 오지 마세요.”


문비가 우산을 들고 설기에게 다가갔다. 문비는 줄을 짧게 바짝 쥐고 설기 몸에 우산을 씌워 주었다. 그러자니 문비는 비를 맞을 수밖에 없었다.


“문비씨는 저하고 같이 써요, 우산.”


라한이 문비에게 다가섰다.


맨 앞에는 설기, 그 뒤에는 팔을 앞으로 내밀어 설기에게 우산을 받치는 문비, 그 곁에 반걸음쯤 쳐져서 문비와 한 우산을 쓴 라한. 결국 이렇게 조금은 우스꽝스러운 행렬이 되었다. 설기는 이제 가끔씩만 불만스러운 소리를 냈다.


“설기, 어디가 아픈 건가요?”


설기에 대해 잘 모르는 라한이 물었다.


“아뇨. 쟤가 저래 봬도 굉장히 별나거든요. 비 맞아서 기분 나쁘다고 저래요. 그건 그렇고, 어떻게 알고 나오셨어요? 한참 작업하실 시간이잖아요.”


“마당에 있던 깨금이가 평소와 다르게 다급하게 짖어서요. 그런데 문비씨, 염소는 안 무서워요? 아까처럼 그렇게 뿔로 막 떠받기도 하는데?”


“다른 염소는 가까이 안 가 봐서 모르겠고 설기는 안 무서워요. 설기가 쬐끄만 새끼염소였을 때부터 봤거든요. 제가 한실댁 할머니 대신 우유도 먹여 주고 그랬어요.”


떠다니는 수증기와 내리는 빗발로 숲과 산이 뿌옇게 한 발 멀어졌다. 대신 곁에 있는 존재들이 한결 또렷해졌다. 샴푸 냄새로 혹은 조금씩 젖어가는 린넨 셔츠로 혹은 닿을 듯 말 듯한 온기로. 그리고 서로 어우러져 일정한 박자를 이루는 발자국 소리로.


“설기는 혹시 백설기의 설기인가요?”


“틀렸어요. 콩설기의 설기예요.”


대답하면서 문비가 쿡 웃었다. 습기와 칙칙함을 날려 버리는 다림질 같은 웃음이었다. 라한의 기분도 깨끗하고 보송하게 펴지는 것만 같다.


“왜요? 저렇게 하얀데?”


그래서일까, 말투가 경쾌해졌다.


“그게요.”


문비가 낮게 속삭였다. 라한이 그녀 쪽으로 상체를 조금 기울였다.


“설기 배하고 가슴 쪽에 달걀만 한 까만 점이 세 개 있거든요. 그래서 백설기가 아니라 콩설기, 설기는 콩씨예요.”


“아하. 그런데 설기가 체구가 좀 작은 편인 거죠?”


라한도 설기에게는 안 들릴 만큼 속삭였다.


“네, 다섯 살 된 암염소치고는 많이 작은 편이죠.”


설기네 집, 그러니까 한실댁의 집은 문비가 머무는 별장으로부터 아래쪽으로 걸어서 십 분이 채 걸리지 않는 곳에 있다. 도로를 따라 가다가 모퉁이를 돌면 내리막이 나오고 그 내리막을 지나 다시 도로의 경사가 완만해지는 지점의 개울 건너편에 있는 조촐한 한옥이었다.


통나무를 이어 만든 다리가 도로와 집을 이어주고 있었다. 예전에는 모양은 거칠어도 시멘트로 만든 다리가 있었는데 어느 해의 홍수에 부서져 떠내려가 버려 지금의 통나무다리를 새로 놓았다.


“라한씨는 멀찍이 떨어져 있는 게 좋겠어요.”


말하고 나서 문비는 처마 아래의 빨랫줄에 걸린 수건 하나를 걷었다. 설기는 벌써 제 우리가 있는 헛간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문비가 설기의 몸에 묻은 물기를 닦아 주었다. 그제야 설기는 우리로 들어가 한쪽에 수북이 깔려 있는 깨끗한 마른풀 위에 다리를 접고 엎드렸다.


“설기는 한실댁 할머니한텐 자식이나 마찬가지거든요.”


통다무다리를 건너 도로로 접어들자 문비가 운을 뗐다. 라한이 문비를 돌아보았다.


나란한 두 개의 우산에 부딪는 빗소리가 또닥또닥 맑다. 본디 은성의 것인 우산의 분홍색이 드리운 문비의 얼굴이 물빛 흐린 풍경 속에서 홀로 은은하니 해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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