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실댁 할머니가 아랫마을에 일 가셨다가 품삯 대신으로 달라고 해서 데려 오셨대요. 워낙 허약하게 나서 같이 태어난 다른 새끼염소 둘한테 밀려서 젖도 제대로 못 얻어먹고, 어미 염소도 나 몰라라 하는 게 너무 안됐더래요.”
설기는 빈사 상태에 가까웠었다. 한실댁의 지극정성과 주위 사람들의 애정 어린 참견과 도움이 설기를 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거기에 문비도 일조했다.
자식을 못 본 데다 정 좋았던 바깥양반도 오십이 채 못 되어 사별한 한실댁에게 설기는 염소가 아니라 마음을 나누는 식구였다.
“그랬군요.”
“은성 언니는 언제 돌아오시나요?”
“솔직히 저도 잘 모르겠어요. 할머니께서 붙잡고 계셔서.”
은성은 사람 한 번 보고 판단하는 거 아니니 집에 있으면서 몇 번 더 만나 보라는 할머니의 엄명에 꽉 붙들려 있다 했다. 전화 저편 은성의 목소리에 섞인 한숨이 라한은 안쓰러웠다.
“네에.”
문비는 그의 집 거실에서 보았던 가족사진 속 할머니를 떠올렸다. 꼿꼿하고 푸른 서슬의 전나무 같은 할머니. 그분이 은성 언니의 친할머니이신가 보구나.
“참, 할머니 취미가 가드닝이에요. 첼시플라워쇼 애청자시고요. 덕분에 제가 큐가든에도 가 봤어요. 할머니, 어머니 모시고.”
재작년 여름이었다. 소혜 여사와 석란이 미텐발트로 라한을 보러 왔었다. 마침 짬이 났던 라한이 두 사람을 영국 런던 서남부의 일명 큐가든 즉 큐왕립식물원에 모시고 갔었던 것이다.
“큐가든…….”
문비가 상념에 젖어 걸음을 멈췄다.
“왜 거기 가 볼 생각을 못 했을까요? 엄마가 여행을 가라고 했을 때 말이에요.”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 자신의 상태가 정상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어쩌면 엄마가 호스피스병동에 입원해 있을 때부터 그랬던 것도 같다. 말하자면, 반쯤은 넋이 나가버려서.
라한은 가만한 눈빛으로 초연히 문비를 바라봤다. 그는 섣불리 묻지 않고 섣불리 위로하지 않는다. 그의 그런 면 때문인지도 몰랐다. 문비가 그와 언제 어떤 식으로 함께 있어도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느끼는 건.
“노르웨이 트롬쇠로 오로라를 보러 갈 때 오슬로를 거쳐 가면서도 오슬로식물원은 생각도 안 나다니…….”
영국은 큐가든으로, 프랑스는 파리식물원, 네덜란드는 암스테르담식물원, 독일은 다렘식물원, 노르웨이는 스발바르국제종자저장고와 오슬로식물원. 일본 하면 그림에도 재능이 있어 훌륭한 식물학 그림을 많이 남긴 식물학자 마키노 도미타로를 기리는 고치현립마키노식물원으로.
세계 유수의 나라들이 문비에게는 이런 식으로 인식되어 있다. 그런데 오슬로를 경유하여 트롬쇠에 다녀오면서도 스발바르국제종자저장고에 대해서도 오슬로식물원에 대해서도 전혀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당연한 거예요. 막 엄마를 여읜 사람으로서는.”
라한의 말은 소박하면서도 설득력이 있었다. 아버지의 죽음을 통해 먼저 겪어 본 사람이기 때문이리라.
사랑하는 사람을 사별하는 일은 남은 이의 영혼을 온통 뒤흔들어 그 형태를 바꿔 놓는 일이다. 그런 엄청난 과정을 겪어내고 있던 사람이 어찌 평소와 같이 합리적으로 사고할 수 있었겠는가.
입술을 꽉 다물고 조각처럼 허공만 보던 문비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저한테는 언젠가 큐가든에서 진행하는 프로젝트에 참여해 식물학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바람이 있어요. 식물 연구하는 친구들도 큐가든에서 일하고 싶다는 말 많이들 하고요.”
그러니 당신은 참 좋은 곳엘 가 본 거라고, 문비는 고개를 주억거려 부러움을 표했다.
“오랜 세월 공을 들여 참 잘 가꾸어 놓았구나, 참 좋은 곳이구나, 느끼긴 했지만 그렇게 대단한 곳인지는 몰랐는데요?”
두 사람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약해졌던 빗줄기가 얼마간 세어졌으나 아무도 개의치 않았다. 서로 알 리 없지만 문비도 라한도 비를 좋아했다. 빗속을 거니는 것도.
“몇백 년 전부터 여러 대륙에 식물학자들을 보내서 식물 종을 수집하고 연구해 온, 세계적으로도 일류로 손꼽히는 식물원이에요.”
“그런 일을 했던 식물학자들을 플랜트헌터라고 하죠?”
“맞아요. 라한씨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아까 말했다시피 첼시플라워쇼 중계를 매년 챙겨 보실 정도로 식물과 꽃을 좋아하시는 할머니가 계시니까요. 몇 세기 전 유럽에서는 자연수집품을 모으는 게 유행하기도 했었다는 얘기도 들은 적 있어요. 수정난풀 같은 희귀식물을 손에 넣으면 자랑도 하고 그랬다고요.”
소혜 여사에게서 주워들었다고 할지 반 강제로 학습당했다고 할지 아무튼 그렇게 알게 된 라한의 앎이 이쯤 되니 문비로서는 감탄이 절로 나왔다.
“라한씨 할머니께선 식물학자가 되셨으면 좋았을 텐데요.”
라한이 싱긋 웃었다. 그 웃음이 상쾌해서 문비도 따라 미소했다.
상대를 기꺼이 전염시키는 저런 웃음은 날 때부터 타고나는 걸까? 사람이 구과식물을 닮아 웃음이 구과식물의 향을 닮았나? 청량하다.
“수정난풀, 할머니께서 사진으로 보여 주셨는데 말 그대로 꼭 수정 원석 같았어요.”
“오늘처럼 비 내리는 날 보면 정말이지 수정 원석이죠. 비늘잎이랑 꽃받침이 물기를 머금어서 더욱 투명하게 보이거든요.”
어느덧 집이 저만치 가까워졌다. 비는 그 사이 또 다시 가늘어져 부슬부슬 내렸다. 암청색 산허리에서 안개가 뭉실뭉실 피어올랐다.
“은성 언니한테 안부 전해주세요.”
양쪽 집 사이에 놓인 다리 난간 옆에서 문비가 말했다.
“그럴게요. 그때 그 스팸 전화는 계속 와요?”
“부재 중 전화로 두어 번 더요. 그래서 차단해 버렸어요.”
두 사람은 잠시 조용히 서 있었다. 비 오기 전보다 더 커지고 맑아진 냇물 소리라도 듣고 있다는 듯이.
“여기, 우산이요. 집도 가깝고, 이 정도 부슬비쯤, 후딱 뛰어서 올라가면 돼요.”
문비가 쓰고 있던 우산을 접어 내밀었다.
“그래요.”
그냥 쓰고 가지 그러느냐는 말을 삼키고 라한은 순순히 우산을 받았다. 이런 아무 의미 없는 사소한 상황에 서운함을 느끼는 스스로가 우습고 황당하다.
“고마웠어요. 저 갈게요.”
가볍게 뛰어가는 문비를 멀거니 보다가 뒷모습에 대고 라한이 외쳤다.
“문비씨와 이야기 나누는 게 즐거워요.”
그 눈에서 호기심이 반짝일 때 몇 배쯤 더 예뻐 보이는 거 알아요?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혹은 해도 되는 날이 올까? 라한은 아직 돌아서지 않았다.
“저도요.”
문비가 뛰기를 멈추고 뒤를 돌아 한 손을 치켜 올려 흔들며 대답했다.
에메랄드그린의 젖은 숲. 성글게 흩날리는 미세한 빗방울. 그 속에서 손 흔드는 그녀의 모습. 마치 거대한 스노글로브 같다.
알 수 없는 근원으로 애틋해진다. 애틋함이 가슴 속 어딘가를 누른다. 아프다. 아픈데 달금해서, 이대로 내내 아팠으면 좋겠다.